컴퓨터교육과 심경은
보통, “6학년 때 몇 반이었어?”라는 질문을 들으면 사람들은 금방 대답하곤 한다. 그렇지만 덤벙대고 잘 잊어버리는 나는 그런 질문에 제대로 기억이 나지않아 졸업앨범을 보며 찾아야만 한다. 반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었을 때 일은 잘 떠오르지않는 다. 그런 나지만, 초등학교 선생님하면 기억나는 분이 있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이어져야 할테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큰 상처를 받을만한 것이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닌, 아주 사소한 사건이었다.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던 아이와 함께 하교하던 중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는 우리를 보며,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내 친구의 이름만을 부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오늘 본 쪽지시험에 대해 칭찬하시면서 숙제를 열심히 하라고 하신 뒤 이내 걸음을 옮기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서럽게 느껴졌나 갸웃하지만 그래도 그 아주 사소한 편애가 당시 어린 나에게는 굉장히 큰 상처였나 집에 가자마자 괜히 서러워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초등학교 시절하면 떠오르는 것은 창틀청소를 잘해서 칭찬받은 일, 선생님이 내 장래희망을 기억해주시고 격려해준 일등의 일상생활의 아주 사소한 부분들이었다. 3학년 수학선생님이 평면도형에 대해 획기적으로 가르쳐줬다던가, 5학년 사회선생님이 지역부분을 독특한 교수법으로 지도하셨던가의 일은 기억나지않는다. 아마 지식의 습득은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만이 경험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은 교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있어 교사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그 중요한 존재로서 아이들에게 ‘즐거운 교실,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주고싶다. 그게 내 교사로서의 기본적인 목표이다. 너무 막연하고 진부한 얘기이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에 역설적이게도 자꾸만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지난 학기 교육공학을 수강했을 때,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다. 그 때, 무수히 많은 아이들을 인터뷰하게 되었는 데 정말 놀랍게도 학교를 좋아하는 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담임 선생님이 차별해요’, ‘공부가 너무 싫어요’, ‘왜 가는 줄 모르겠어요’ 등 학교라는 곳은 엄마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이었고, 선생님은 그런 학교에서 만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만은 이 질문에 다른 대답을 하게하고 싶다며 다짐했었다. ‘방학이 싫어요’, ‘학교가 너무 즐거워요’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상상하며 교사로서의 꿈을 다졌다. 이를 위해, 내 자신이 노력해야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아이들을 자주 안아주는 일, 이름을 불러주며 관심을 갖는 것, 아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편견없이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해 알찬 수업내용으로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하는 것등 모든 부분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제 이것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비전을 세워보자면,
먼저 5년 뒤,
내 목표는 일기쓰는 선생님이다. 초임교사로서 업무도 많고 실수도 잦고 여러모로 정신이 없다. 교생이나 과외, 혹은 교육봉사로 아이들을 만나왔다지만 이제는 다르다. 한 교실의 어엿한 선생님으로서 서른 명의 아이들을 책임지는 가장이다. 좀 더 책임감을 갖고 하루하루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때이다. 막 대학에 들어왔을 때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아이가 두 시간의 수업 중에 책상 밑으로 들어가버린다던지 바닥에 갑자기 누워자버린 적이 있어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무섭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하고 무조건 혼만 내었더니 결국 아이와의 사이가 틀어져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공부할 때마다 힘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이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잘못이 컸다. 아이가 공부할 맘이 들게 하는 것도 내 의무 중 하나였다. 그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아이가 마냥 밉기만 했었다. 현장에서 부딪히는 아이들은 모두 ‘말 잘듣는 아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익숙치 않은 나는 그런 아이들과 부딪힐때마다 ‘내가 선생님으로서의 자질이 없나’하는 생각에 고민하고 결국 교사로서의 직업에 흥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이러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그에 따라 내 하루를 반성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매일 일기를 쓰며, 아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내 언행에 반성하며 하루하루 참교사에 다가갈 것이다.
10년 뒤,
이제 나는 어느 덧 한 아이의 엄마이고 학교생활에 익숙한 교사이다. 초임 때와는 달리 아이들에 대한 열정이 식을 수 있고, 가정에 관심이 쏠리기 쉬운 시기이다. 하지만 처음의 열정을 잊지 않았다면 내가 만들고 싶은 즐거운 교실 만들기를 시작하는 데 적절한 시기이다. 대학원을 졸업하여 좀 더 깊은 공부를 한 뒤이고, 이미 아이들과 학교에도 익숙해져 그에 맞게 다양한 활동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농작물 재배와 우리반 농장, 작은 음악회 등과 같은 활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 우리 동네에 만수초등학교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낮은 울타리를 쳐놓고 거위, 오리, 토끼등의 동물을 풀어놓고 기르는 데 가끔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이 그 곳에 들어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게 너무 따뜻해보여 나도 저런 학교를 만들었으면 싶었다. 내가 10년 뒤에는, 우리 반 아이들부터라도 작은 농장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사랑하는 계기를 깨닫게 되었으면 싶다. 또한, 가르침에 있어서는 ‘외워’라는 말 대신 원리를 설명해주는 교사이고 싶다. 지도서를 보고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닌 충분한 학습준비를 통해 아이들이 원리를 이해하여 공부는 암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다.
20년 뒤,
어느 덧 사십 대이다. 삼십 대때 열정을 쏟아 시행해본 활동들의 결과를 생각해볼 수 있을 때이고, 아이들에게 뭐가 유익할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베테랑 교사이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교실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나의 열정은 아직도 변함없다. 대안학교 교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공교육안에서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는 체험학습을 계획할 것이다. 또, 이제는 아이들의 진로에도 힘을 쏟고 싶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묻는다면 의사, 판사, 교사가 제일 많았다. 이는 아이들이 진실로 하고싶어서라기보다 부모의 희망, 또는 직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일 것이다. 며칠 전 티비에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게 해주는 회사를 소개하는 광고를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학교에서 담당해야할 몫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 나는 다양한 직업들의 제자를 초빙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할 수 있다면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직업체험을 하고싶다. 아이들이 각자의 소질에 맞는 큰 꿈을 키워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30년 뒤,
이제 나는 원로교사이다. 아이들은 독립해서 떠나가고 생활은 안정적이다. 교사인 남편과 한적한 시골학교로 떠날 것이다. 장학사도 하고 싶고 교감도, 교장도 하고싶다. 하지만 역시 아이들과 가까이 호흡할 수 있는 교사로 퇴직하고 싶다.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는 사립이었다. 교감선생님은 나이 순이었고, 한 자리가 비어 국어 선생님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자신은 아이들과 수업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누구나 원하는 그 자리를 마다하셨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교사가 된다면, 이런 교사가 되리라. 승진을 위해 연구수업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에서 경쟁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소외된 지역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퇴직할 때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랑하는 삶을 살고싶다.
내 별명은 심초딩이다. 하도 까불거리고 생각이 어려서 붙은 별명이겠지만, 나는 이 별명을 다른 의미로 교직 생활하는 동안 가지고 싶다. 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해해줄 수 있고 나태함에 빠지지 않는 열정있는 선생님. 아이들에게 친구같은 선생님. 교단에 있는 마지막 날까지 아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교사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