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육과 김지아
비전이란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을 말한다.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이라……. 내일에 대한 확신조차 할 수 없는 내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사회와 제도 속에서 과거의 ‘나’가 어떻게 미래의 ‘나’를 단언할 수 있겠는가. 획일적으로 같은 내용을 자신의 계획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진심이 결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긍정적인 교사상만을 발표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가 되겠다.’ ‘발전하는 교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우리가 만난 수많은 별로인 교사들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그들도 분명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답변을 했을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은 교사로서 권위를 학생에게 휘두르고, 극심한 차별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스승으로 기억되는, 혹은 삼고 싶은 교사가 매우 드물다. 나는 이러한 이유가 매우 궁금하다.
과거 나는 교사에 대해 학생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딱 2가지라고 생각했다. 좋았다, 혹은 나빴다. 하지만 현재 나는 학생들이 교사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4가지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좋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나빴다, 당시에는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좋았다. 혹은 과거에도 좋았고 지금 생각해도 좋다, 과거에도 나빴고 지금 생각해도 나쁘다. 나는 운 좋게도 지금까지 만났던 선생님들로부터 이 4가지 감정을 다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감정들 중 가장 최악은, 당시에는 좋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나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단순히 어린 학생의 미숙한 판단력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따라서 최소한 교사는 학생이 본인에 대해 좋았다고 느꼈던 감정을 나쁘게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는 학생을 학생으로 대해야 한다. 특히 초등학교 교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초등학생을 상대하다 보니 이들을 ‘학생’으로 보기 보다는 ‘어린이’ 혹은 ‘아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학생을 대하는 말투와 행동으로 나타난다. 초등학생들은 일반적으로 담임교사를 적극적으로 따른다(특히 중․저학년의 경우). 그리고 그들은 교사가 하는 행동이 모두 옳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어린 학생들이 지각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학생들이 성장하고 나면 당시 교사의 행위에 대해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즉, 당시 교사의 행위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지각은 곧 교사에 대한 나쁜 감정으로 발전한다. 교사가 학생을 학생으로 대하지 않을 경우, 학생의 감정뿐만 아니라 교사 개인에게 있어서도 권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또한 교사는 도태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도태되지 말아야할 대상은 시대의 발전뿐만이 아니다. 학생 및 학부모와의 관계 혹은 다른 교직원들과의 관계도 해당된다. 흔히 도태에 대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발전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초임교사에게도 도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도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교류와 소통이 필요하다. 이때 본인의 위치를 고려하여 소통을 한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초임교사에게는 적극적으로 선배들에게 물어보는 게 소통이다. 반면 수석교사에게 소통이란, 초임교사에게 지나치게 간섭을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적극적으로 조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임교사와 수석교사 사이에 있는 교사는(경력교사 및 우수교사) 이 둘 사이의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서 소통을 실현할 수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서술한 내용도 결국 ‘좋은 교사가 되겠다.’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선’이 아닌 ‘최소’를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다른 생각들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