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경사(經師)가 아닌 인사(人師)가 되기 위해
(내용) 남보다 한참 늦었던 출발...왠지 시간도 더디게 갈 것만 같아서 마음을 졸였었지만, 녹록치 않았던 바쁜 학교생활 덕에 시간은 지나가고 벌써 3학년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숲의 나무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교사가 되기 위한 지식을 하나하나 쌓으면서 기본적 소양과 지식 수양에 매진했다면, 이제는 ‘숲’으로서의 산을 보기 위해, 가깝게는 2년 뒤 교사가 된 후의 나의 설계도를 세우며 교사로서의 비젼을 세워야 할 때가 왔다. ‘교사로서의 나’의 밑그림 작업은 아직 두렵다면서 미룰 일도 아니고, 남의 일처럼 가볍게만 볼 일도 아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여기까지 온 만큼 훗날 ‘교사로서의 나’ 또한 후회되지 않도록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인 것이다.
고전(古典)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는 책을 보면, 경사(經師)는 만나기 쉬워도 인사(人師)는 만나기 어렵다고 개탄한 글귀가 있다고 한다. 또한, 독일의 작가 레씽(Gotthold Ephraim Lessing 1729-81)은 “서책(書冊)은 나를 박식자는 만들지마는 인간(人間)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우리는 아동에게 지리(地理)를 가르치느라고 그로부터 지구(地球)를 빼앗고, 문법(文法)을 가르치느라고 언어를 빼앗고 있다”라고 하였다. 즉, 글자 그대로의 지식만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사람을 만드는 교사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글귀들인 것이다.
확실히 오늘날의 많은 교사들이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간에 글만 가르치는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아직 어떤 교사가 될 것인지 선택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는 이러한 경사(經師)가 아닌 인사(人師)가 되기 위해 확실한 밑그림을 그려놓아야 할 것이다.
초임 발령을 받은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의욕이 넘치는 신규교사일 것이다. 같은 동기들보다 늦은 나이에 출발했다 해서 결코 가르침에 대한 나의 열정은 뒤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멍이 들면서도 그만둘 줄 모르는 B-boy들이나 땀흘려가면서도 높은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 역시 그 일에 대해 열정을 느끼고, 즐기기 때문에 멈추지 않는 것임이 틀림없다.
나 역시 갓 교사가 되어 사람을 만들기 시작한 약 5년 안팎으로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밤을 새워가면서 아이들에게 유용할 새로운 학습법과 과감한 교수법을 익히고 사용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역동적으로 보낼 것이다.
새로운 교수법과 이론들이 무조건 아이들에게 좋을 수는 없지만, 다소 이러한 처음 시도에 주어지는 낯섬에 대한 부담을 견디기에는 열정이 아직 식지 않은 젊은 우리네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여러 유명한 학자들이 소신껏 제시한 교육적 방법들을 시도도 해보지 않고, 안정적인 것만 추구하여 내버려둔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도 너무나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교육적 이론을 적용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여긴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아이들에게 시도하기 전에 충분히 연찬하고, 경험 많은 동료 선배교사들에게 수없이 많은 자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면서 아이들에게 적용할 만한 것들이라고 여겨질 때 실천할 것이다. 다소 경력이 쌓였을 때 오히려 쉬울 법한 이러한 일을 초임시기에 하려는 이유는 말 그대로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지칠 줄 모를 때 열심히 갈고 닦아 연찬하고 연구하는 습관을 몸에 베이게 하고, 제대로 된 교수법과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태도를 만들어 놓고 싶어서이다.
물론, 5년이 지나고 10년 정도 지나면 매사가 모두 뜻대로는 되지 않고, 뚜렷한 결과가 보이지 않는 사람 만드는 직업인 탓에 다소 지치고 회의가 오기도 할 것이다.
특히나, 물건이나 일을 다루는 직업이 아닌 사람을 다루는 직업인만큼 교사는 자신이 소신껏 펼쳐온 교육에 대한 성과를 눈으로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교사들은 이 시기에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왔는가 매너리즘에 빠지며, 힘들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기를 이용해 자기를 되돌아보고 자기수양의 기회를 삼음도 좋을 법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몸소 부딪쳐 가면서 학자들의 이론과 교수법을 현장에서 활용해보고, 나름 아이들에게 적합한 것과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나름 거를 수 있었을 것이며,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어느 정도 아이들이 원하는 교사와 내가 어느 정도 부합하는 지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교사로서 부족한 면을 좀 더 보충하여 공부하거나 자신있는 분야를 심화하여 파고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요즘은 전문적이고 훌륭한 교사 양성을 위하여 국내․외 연수나 연구할 수 있는 기회제공이 상당히 다양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 적극 이용하여 자칫 정체되어 숙제검사나 하고, 공문서작성으로 수업시간을 떼우게 될 뻔 했던 매너리즘의 시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고 싶다. 즉, 위기를 호기로 바꿀 수 있는 지혜로운 교사로 거듭나고 싶다.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람을 만들기 위한 소명을 받아 교사가 되었다. 따라서, 자기수양도 좋지만 일생의 주(主)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육자로서 보내야 함이 마땅하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고쳐 바로잡으면서 본연의 자리로 재빨리 돌아와 지식전달은 물론 참된 인간이 되도록 철저한 계획아래 심신을 다하여 가르치기 위해 교단위에 다시 서야 하겠다.
이미 남들보다 10년을 돌아온 ‘교사로서의 나’는 그만큼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에 너무나도 안타깝다. 특히, 나의 경력에 비해 아이들과의 시간적 Gap은 다른 동료교사들보다 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정도 연륜이 쌓인 나를 보면서 아이들이 느끼기에 자칫 자신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당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교사는 우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과 래포(rapport)형성이 매우 중요한데 처음부터 아이들이 교사에 대해 전적으로 믿고 따를 의지가 부족하다면 교육은 반절짜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 자신들을 아끼고 사랑할 뿐 아니라 생각의 괴리없이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고 적절히 가르칠 때, 학생들은 100% 신뢰하고, 그만큼 교육의 효과는 배(倍)가 될 것이다.
따라서, 중견교사가 되었을 15년 후의 ‘교사로서의 나’는 그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가 되는 데 노력할 것이다.
아이들의 주된 관심사나 가십거리를 흘려버리지 않고, 이를 활용해서 수업의 흥미유발거리로 이용한다던지 아이들과 가능한 대화 기회를 만들어 교사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를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처음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지식 전달에만 유능한 교사에 그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인사(人師)가 되는 것을 지향할 것이기 때문에 정(情)을 주는 교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힘들겠지만, 초임시기의 의욕을 되살려 기계적인 일기 검사가 아닌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아이들의 일상을 읽고, 거기에 마음을 담은 글귀하나라도 정성껏 쓸 줄 아는 교사가 될 것이다.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실망하게 되었던 나의 어린시절을 비추어 보아, 좀 더 존경받는 어른으로서의 교사로 비추기 위해 인사만 받아먹으려는 권위적인 교사에서 벗어나 휴지하나라도 먼저 줍고, 비뚤어진 액자도 먼저 매만지는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의 역할모델로서의 교사로 충분하도록 행동에 신경 쓸 것이다. 이 때는 교사들과 보낸 시간이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실에서의 시간이 꽤 많아진 때이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그냥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데에서만 바른 교사가 될 우려가 크다. 그러나 교사는 다른 직업과는 다르다. 교실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까지 교사의 행동은 아이들이 모방하게 된다.
아이들은 스펀지이다. 자기를 가르치는 교사를 보면서 교사의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우선 받아들이고 보는 게 대부분의 아이들이다. 왜냐하면, 교사란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믿을만한 조력자라고 믿는 게 대부분의 학생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교사가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이를 보고 학생이 평범한 밥벌잇군으로 멈추게 될 수도 있고, 사회와 국가의 숨은 공헌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약 25년이 지난 후부터는 아쉽게도 나는 먼저 교단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평탄한 교사생활을 하게 된다면, 교감과 교장이라는 진급이 뒤따라오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비젼을 세우면서 이러한 승진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이유는 교단에서 분필가루를 묻히면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의 내 욕심으로는 아무리 늘여도 모자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교감이나 교장이라는 자리가 나의 교단생활을 충실히 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기회라면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현실을 반영해 보고 별도의 노력을 들여야한다는 전제가 주어지게 된다면 나는 고민없이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부대끼는 삶을 택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러한 방향의 설계도는 잠시 접어둔 이유이다.
정년을 몇 년 앞 둔 이 시기의 나는 어떠할까? 사실 이것은 과한 욕심일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교편생활에서 정립한 나의 교육적 신조를 소신있게 펼칠 수 있는 학교를 세울 준비를 하고 싶다. 이제까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현장속에서의 교사의 임무에 주력했다면, 이제부터는 물론 교사의 소임에는 소홀히 하지 않을 테지만 여분의 시간은 알뜰히 쪼개어 교육행정에 관해 관심을 둘 것이다.
나의 교육신조를 담은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는 것은 마음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현장경험만 있어서 되는 게 분명 아니다. 그만큼 행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갖추어야 함은 자명하다. 학교를 운영하는 윗 상사나 행정관련 일을 조언받고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의 수년간 쌓아온 교육적 노하우를 수십년 전 열정에 빛나던 나의 초임시기를 떠올리며 갓 발령 받은 신규교사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고 싶다.
지금도 현장 경험이 있는 교수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교대에서 이론으로 배운 교직과 현장에서 접하게 되는 교직과는 참으로 많이 다르다고 하신다.
교사가 현재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2,30년 뒤에는 그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면, 교사는 가능한 시행착오의 횟수를 줄여야 한다. 따라서, 나는 교직을 떠나기 전에 하루라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나를 이어 사랑하는 아이들을 맡아 줄 신규교사들을 위해 아낌없는 조언과 교육적 노하우의 전수에 주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