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선언

국어교육과 김신혜

미래 교육 2009. 5. 31. 23:59

작년부터 허브 화분을 하나 가꾸고 있습니다. 창가에 얹어 놓으니 삭막하던 방이 한결 싱그러워 지더군요. 처음엔 말려죽이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나름 세심하게 가꿨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물 주는 것도 며칠씩 잊기가 일쑤였습니다. 5월. 창밖의 나무들은 점점 푸르러지는데 제 방의 화분은 갈수록 시들시들. 바쁘다는 핑계로 넋을 놓고 지내다가 허브 잎 거의 절반이 노랗게 변하고서야 퍼뜩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게을렀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이 화분을 살려내기로 결심했지요. 때맞춰 물 주기와 햇볕 잘 드는 곳에 놓아주기는 기본, 음악과 대화가 식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기에 (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가끔 화분 앞에서 단소도 불어주고, 예쁘구나- 라고 말도 걸어줬습니다. 잎도 자주 쓰다듬어 주고요.

 

이런 제 정성어린 마음을 허브도 알아줬는지, 날이 갈수록 싱싱해지더니, 드디어 며칠 전 그 드물다는 연보랏빛 꽃을 피우기까지 했습니다. 제 애정이 전해진 것 같아 꽃피운 화분을 바라볼 때 마다 흐뭇해집니다. -죽어가던 허브가 꽃피울 정도로- 사랑의 힘은 위대하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이렇게 말 못하는 식물도 애정에 반응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입니다. 그 때 한창 우리나라에 IMF라는 큰 위기가 닥쳤었지요. 아버지의 사업부도로 저희 가족은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었습니다. 어렸던 저에겐 그 일이 무척이나 심각하게 다가왔었고, 원래가 그리 활달한 편이 아니었던 저는 점점 더 내성적이고 말없는 아이가 되어갔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의 저는 한없이 음침하고 우울해하는 4학년생 이었죠. 바로 그런 순간에, 저는 제 꿈이 ‘선생님’이 되게 만들어주신 한 분을 만났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 4학년 2반, 박옥희 담임선생님. 그런 저의 변화를 어떻게 아셨는지 (날마다 검사하셨던 일기장에는 제 일에 대해 한 마디도 쓰지 않았었는데 말이죠.) 괜히 한 번 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한 번 더 눈을 마주쳐 주셨습니다. 아이들 모두가 하길 원하는 심부름이 있으면 신혜가 잘 하겠네, 라고 사알짝 저를 불러 주시기도 하셨고요. 쾅! 하고 세상이 뒤바뀔 정도로 어떤 큰 일을 특별히 해 주신 건 아닌데, 그런 일상의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선생님의 애정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직 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사소한 일 하나만으로도 큰 느낌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순수하기 때문일까요. 저 역시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선생님의 애정 어린 손길과 눈빛을 통해 세상에서 내게 관심을 갖고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위험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떠올릴 때 마다 지금도 저를 미소 짓게 만드는 추억이 있습니다. 늦잠을 자서 학교에 지각했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연히 아침은 못 먹었습니다. (그 땐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셨었어요.) 헐레벌떡 첫 수업이 막 끝난 교실에 도착하자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복도로 불러내셨습니다. 당연히 혼날 줄 알고 잔뜩 긴장해 있던 저에게, 선생님은 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선 그 빵을 5분 내에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하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벌’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은 저희 반 아이들에게 한 번도 매를 사용하셨던 적이 없습니다. 서로 싸운 아이들은 반 친구들 모두 앞에서 1분 동안 껴안고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동화에서도 이 벌칙이 나오더군요. 저도 나중에 담임교사가 되면 꼭 사용할 생각입니다.) 선생님께 버릇없게 대한 아이는 선생님을 껴안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벌칙이 부러웠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데, 그 벌을 받던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선 땀까지 뻘뻘 흘리더군요. 모두 다 생각할수록 빙긋이 웃음이 지어지는 기억들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쭉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박옥희 선생님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역시나, 선생님의 세심함을 이 친구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갑자기 모두 눈 감아! 라고 하셨다더군요. 저만큼이나 수줍음이 많은 그 친구는 우리 반이 뭘 잘못해서 혼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네요. 그런데 선생님이 바로 그 친구 앞으로 오더니 열려 있던 바지 지퍼를 살짝 올려 주셨답니다. 반 아이들 앞에서 말하면 수줍음 많은 친구가 부끄러워할까봐 그런 세심한 배려를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학생들을 생각하는 선생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초등학교 때 수련회에 가면 밤마다 늘 하던 캠프파이어와 촛불 의식이 떠오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빈 초 하나를 들고 운동장에 서 있으면, 어디선가 촛불 하나가 켜지고, 그 촛불에게서부터 점점 작은 불이 번져옵니다.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줄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늘어납니다. 밝아집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 특히 작은 일에도 민감한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천성이 섬세한 편인 제 성격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애정 어린 손길로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교사가 되길 바랍니다.

 

 

5년 후, 저는 28살입니다. 이 때의 저는 새내기 교사로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겠지요. 20대의 젊음과 열정을 가진 선생님으로, 제 반 학생들을 한명한명 보듬어주고 신경써주려 노력할 것입니다. 교사 1명 당 30여명의 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현실에서 이것은 무리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 전체의 마음을 전부 얻는 것은 신임 교사로서는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1년을 꼬박 같이 보내는 학생들 중 1명의 마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수확입니다! 적어도 30년 동안을 담임교사로 지낼 텐데, 매 년 1명씩이라면 제가 퇴직할 때쯤이면 30명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대단하지요.

과외를 하며 느낀 것인데, 공부를 좋아하게 되려면 먼저 그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저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김신혜 선생님과 함께하는 즐거운 수업시간! 물론 쉬는 시간도, 점심 시간도, 청소 시간조차도 모두 즐거워야겠지요. 그리고 국어과의 특성을 살려, 반 학생들에게 동화책을 읽게 하고 가끔은 멋지게 구연도 해 주겠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책을 좋아하게 될 기회를 제 학생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독서를 통해, 몸 뿐만이 아닌 학생들의 마음이 포동포동 살찌도록 말입니다.

 

10년 후, 저는 33살입니다. 어느 정도 신임 교사 티를 벗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대학원에 가서 국어교육에 대해 좀 더 심도있게 공부하고 싶습니다. 특히 아동문학, 동화나 동시 쪽에 관심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 글짓기 교실을 맡을 것입니다. 저도 부족하게나마 몇 편씩 글을 써서 아이들에게 읽어 주기도 하겠지요. 제 글의 소재는 거의가 학생들일 것입니다. 저는 제가 가르치는 모든 학생들이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문학이라는 것을 통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길 바랍니다.

 

20년 후, 저는 43살입니다. 인격적으로나 교육경력으로나 원숙미가 배어나올 시기이겠지요. 이 시기의 제가 일상에 찌들어 있거나,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이기를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교직생활 20년이라는 연륜과 더불어 여전히 뜨거운 마음을, 열정을 가진 교사이길 바랍니다.

 

30년 후, 저는 53살입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성공'이라는 시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저는 교사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이 시에서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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