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면 나는 주저 없이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그 당시에 나는 꿈을 장래희망과 동일시했었다.
대개의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 선생님에 대한 어떤 동경, 어떤 존경의 마음에서 그러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내가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중고등학교에 들어서서도 꿈과 비전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꿈과 비전을 장래희망과 동일시하며 내가 미래에 무슨 직업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할 지, 어떤 직업이 전망 있는 직업인지 찾아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수 많은 직업을 찾아보면서도 딱 잘라 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와 같은 포괄적인 꿈이나 비전에 대한 생각이 부족했었고, 나의 역할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에 장래 희망을 정하는 데에도 더욱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런 상태로 어찌해서 교대에 입학해서 약 2년 하고 반을 지나오게 되었다. 숱한 교수님들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교육학 서적을 공부하고 교육과 관련된 책도 읽어 보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실습에 나가서 현장에 있는 선생님과 학생들을 볼 수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특별한 일이 없다면 장래희망은 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교사가 되느냐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종합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적어도 내가 맡은 반 안에서는, 학생들이 모두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게 해 주는 선생님이고 싶다. 어느 한 아이에게 치우침 없이 동등하게 대우해 주면서 말이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때에 약간 과할 때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에게서 거리를 두게 되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의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택했었다. 분명히 가까이에서 보는 친구에게 고쳐야 할 점을 알려주고 어떻게 해야할 지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구의 단점을 직접 말했다가는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는 내 일이 아니니까 괜히 상관하지 말자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점점 그 친구와 다른 친구들 사이는 악화되었고 그 친구는 기숙사를 나가게 되었다. 직접적으로 관여한 건 아니더라도 일말의 죄의식은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오고 봉사활동이나 실습이나 어떤 경로로든 학생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런데 어디에서든지 한두 명 정도는 집단에 적응을 못하고 겉도는 아이들이 보였다. 어느 곳에서는 다른 친구들이 적당히 이해해주고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이런 반복되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미안함과 함께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적어도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나의 교실에서의 꿈과 비전은 이렇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