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비전
영어교육과 강민주
요즘 빠진 뉴에이지 곡이 생겼다. Jon Schmidt의 <All of me>인데, 우연찮게 들은 이 곡은 음표들이 왈츠를 추는 것처럼 속도의 완급이 잦고 화음이 많이 들어간 곡이라 연주하기 어렵다. 하지만 곡이 매우 예뻐서 나는 부쩍 틈만 나면 재생버튼 누르기 바쁘다. 서로 다른 음들이 한 번에 눌리면 더욱 풍부한 소리가 나게 되고 한 마디 안에 들어가는 음표의 수만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선율도 많아지고 다양해진다. 서로 다른 음이지만 하나의 곡 안에서 예쁘게 연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장/단조로 큰 틀이 잡히고 기초가 되는 마디 하나를 작곡하게 되면 그 뒤로 이어질 마디는 완전히 빗겨나가지 않는 선에서 또 다른 음들로 구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연주되고 곧 우리 귀에 아름답게 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작곡가가 쓴 곡이라면 대중들에게 쉽게 음악적 공감을 얻어내기 마련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아이들이 모여 한 반을 이루고 교사가 가진 교사관, 교육관이라는 틀 안에서 아이들에게 지식을 나눠주고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면서 자연스러운 교실 분위기를 형성한다. 여기서 교사가 어떻게 학생들을 다루는가에 따라 교실이 1년 동안 행복한 곳이 될지 그렇지 못할지가 결정된다. 즉 교사의 비전, 교사관이 확실해야 우리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나만의 교사의 비전을 써보려 한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교육의 목적>이라는 책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교사로서의 사명감이 그다지 높지 못한 상태에서 교육대학교에 입학하였고 뚜렷한 주관 없이 커리큘럼대로 교육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이 책은 지침이 될 만 하였다. 화이트헤드는 “교육이 시작되면 반드시 발견의 즐거움을 경험해야 한다.”고 했다. 발견의 즐거움 없이는 교육이 끊이기 십상이고 아이들의 학습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는 것은 당연히 초래된 결과이다. 이러한 교육의 문제는 학생들이 나무를 통해서 숲을 보게 하는 일이다. 중,고등학생 때의 내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내신보다 모의고사 성적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좁은 범위 내의 시험은 잘 치르지만 시간이 흐른 후 전체적인 범위 내에서 다루는 시험에서는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는 나무들만 볼 뿐 숲을 보는 능력이 없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담임선생님들은 걱정하셨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항상 모의고사보다 내신에 더 힘쓸 수밖에 없었다. 숲을 본다는 것은 결국 많은 나무들을 한눈에 넓게 본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나무를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숲은 나무들로 만들어진 하나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통해서 숲을 본다는 의미는 아마 숲 안에서부터 본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곳에서 심원법으로 바라보는 숲은 ‘조망’할 수 있지만, 숲 안에서 올려다보는 고원법의 숲은 결국에는 나의 시야가 확보되는 범위 안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하나의 큰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보다는 작게 여러 개의 네트워크가 형성됨으로써 유기적인 관계 형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나무를 통해 숲을 본다는 것은 교육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띄엄띄엄 안다는 내재적 의미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자기 발전을 자극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이 전제의 당연한 결과로서 교사 역시 생생한 사고를 통해서 활동적이 되어야 한다. 내가 직접 걸었던 숲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준다면 이곳을 지난 다음 갈래에서는 어떤 종류의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고 전과는 다른 어떤 풀내음이 날지도 예측하게 만들 수 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점이어서 매우 공감이 갔는데, 오페라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오페라에 대해 완전히 알려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오페라여도 굳이 가서 한 번 더 보고, 즐겨하지 않는 분야의 것이라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고 또 실천했었다. 내가 아닌 사람에게 아이의 교육을 맡기기보다 선생님 된 입장으로서 내가 직접 가르치고 돌봐주고 싶었기 때문에 했었고, 또 미래의 아이들 덕분에 난 내가 가질 수 있는 기술, 능력이라면 도전하고 얻어내려고 했던 과정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씩 늘어가는 능력을 보노라면 스스로가 뿌듯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
화이트헤드는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지 말며 가르치는 바는 철저히 가르치라고 확언했다. 내 욕심껏 부리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의 수준에 맞춘 교육이 올바른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밤 10시까지 학원에 있느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초,중,고등생들이 태반이고 아이가 학교나 학원이 아닌 시간에 학업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는 학부모들이 다수다. 교육에는 ‘리듬’이라는 것이 있다. 교육의 리듬은 아동과 교과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화이트헤드의 독특한 교육적 시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위의 예시처럼 지적 성장의 리듬과 특성을 무시하는 탓에 교육은 쓸모없는 게 되고 만다. 방목과 생생한 신선함의 격려라는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건전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직 교사였던 이지성 작가가 말한 것처럼, 아이들이 깨어있는 시간의 60%는 뛰어 놀아야 제대로 클 수 있다는 것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를 단 한 번도 강요하지 않으셨고 내가 궁금해졌을 때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호기심과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가 내 공부의 동기가 되어서 습관이 되었다. 꽃을 빨리 피우기 위해서 햇빛도 많이 쬐어주고 물도 많이 준다고 해서 꽃이 빨리 피는가. 오히려 말라 죽거나 썩어 죽는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도 똑같다. 아이들의 각 발달단계에는 어울리는 수준의 교육이 있고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나는 절대로 억지로 하는 공부를 가르치고 싶지는 않다. 교육의 리듬이라고 불러온 것이 바로 이 자유와 훈육을 발달의 자연스런 진동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늘어난 고무줄로는 더 이상 머리를 묶을 수 없다. 자기의 탄도에 훨씬 벗어나도록 늘어뜨려 놓으면 고무줄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들 또래에서는 그만큼만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더 준다고 해서 더 잘하라는 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가깝게 지내는 현직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아이들이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어쩔 때 보면 정말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밉게 보이고 때리고 싶다.” 얼마나 천방지축이면 이런 말까지 할까 싶은데, 그 고충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니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아이들이 왜 선생님의 마음을 몰라줄까? 아마 아이들을 하루만 사랑하니까 그런가보다.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는 것처럼 아이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끊임없이 아이에게 깊은 사랑을 전해야한다. 꽃은 자신이 피어날 곳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느 환경에서 태어나고 어느 부모님 밑에서 길러져왔는지 중요하지 않다. 나를 만난 순간부터는 오롯이 나에게 좋은 것만 가지고 좋은 일만 만들어 주고 싶다. 한국의 수재들이 고등학교까지는 각종 상을 휩쓸며 온갖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 평범해지는 이유는 자신만의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다. 공부란, 인간 다음의 일이다.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도 하고, 나부터도 사람됨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성 함양이 주된 목적이자 목표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사람이 덜되었는데, 아이들만 사람이 되는 경우는 없다. ‘가르치려 하면 실패할 것이고, 함께 실천하려고 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는 어느 글귀가 생각난다. 필리핀 톤도의 어느 달동네 선생님의 교사관이 투철하여 인상에 남았다.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좋지 않은 행동을 하면, 톤도의 교사들은 우리로서는 좀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고 한다. 교사가 그 학생을 자신이 사는 집으로 데려와 학생의 태도가 좋아질 때까지 함께 살며 교육한다.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엄청난 책임감으로 아이들을 우등생이 아닌,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있다. 내가 톤도의 선생님만큼 투철함을 가질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사실 그럴 용기가 없다. 하지만 닮아보려고 한다. 아이가 변하는 모습이 나에게 새로운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이곳 톤도 교사들의 교육관을 관통하는 관념은 다음과 같다. ‘주입시켜라, 한 끼를 먹을 것이다. 행복하게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평생을 먹을 것이다.’ 행복의 차이가 곧 교육의 질을 좌우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을 느끼는 교육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