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학습공동체 ‘수유+너머’와 교사로서 ‘나의 꿈’
수학교육과 20120102 최솔아
유학의 경전 중 하나인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하였다. 그 옛날 즐거움의 대상이었던 배움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그저 학생들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현재 대한민국 학생들은 사회가 규정해버린 ‘성공’이라는 것을 목표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의무감에 이끌려 공부를 하고 있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이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절대적인 성공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교육제도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지금의 교육제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면 더 나은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나라는 급격한 근대화와 함께 공교육제도 또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동안 공교육제도는 학생들을 ‘무한 경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끊임없이 압박해왔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기계처럼 움직이고 시키는 일만 해낼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은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소유형 인간’과 ‘존재형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학생들은 무엇이든 소유하려고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을 소유하는 것만이 일등이 되는 길이었고, 일등이 되지 못하는 것은 사회 속에서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일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공부란 부와 지위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수단처럼 작용했고 이것이 굳어져 현재의 대한민국 교육이 되었다. 경주트랙에 선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압박감을 느꼈다. 비록 경제발전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는 이룩하였을 지라도 정신적인 풍요는 더욱 고갈되어 갔다. 그 옛날 공자가 했던 말은 그저 ‘공자의 말’이라는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옛말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 사태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인가?
세 달 전 과제를 받고나서부터 많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교육의 목적은 ‘즐거움’이었다. 배움에서 즐거움이 없다면 그러한 교육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도중 우연한 계기로 인해 ‘수유+너머’라는 단체를 접하게 되었다. 혹시 임산부 단체를 말하는 것일까? 이 단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수유’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곧 ‘수유’가 이 단체를 처음으로 시작했던 ‘수유리’라는 공간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까운 미래에 참 교육을 행하자는 포부를 가진 사람으로서 이 단체를 몰랐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수유+너머’는 연구와 생활을 결합한 공동체로, 1999년 고미숙씨의 아이디어로 출발한 조그만 공부 모임이라고 한다. 고미숙씨는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한국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한민국에서 ‘시간강사’로 쫓기듯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회의감을 가지고 그동안 모은 모든 돈을 털어 연구 공간을 만들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모아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10년이 갓 넘은 이 단체는 8년 전 수유리에 20평 방 하나를 월세 내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3층짜리 건물을 통 채로 임대해 쓰고 있을 만큼 확장되었고, 8년 전 대 여섯 명 회원으로 시작했던 것이 현재는 정회원과 비 정규회원을 합쳐 2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조그만 공부 모임이 불과 8년 만에 인문학의 활로를 개척할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니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그 단체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앎과 삶의 일치’라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들의 연구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어쩌면 이 단체가 수명을 다해버린 한국 교육현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다 주지 않을까?
‘수유+너머’의 공간은 각 회원들의 자유로운 학습과 토론, 그에 따른 체험활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먼저 회원들 중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이 일치하는 사람들끼리 소규모의 그룹을 만든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세미나’를 알린다. 인터넷에 계시된 안내문이나 벽보를 보고 같은 분야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 모여들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세미나가 운영된다. 세미나는 대게 몇 달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그룹 내 회의를 통해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 있는 책을 몇 권 고른다. 매주 한권의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회원들끼리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이 세미나의 전형이다. 각 토론마다 한명의 발제자가 있는데 이는 회원들끼리 차례로 맡게 된다. 발제자는 토론 전에 책의 주제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토론의 전반을 이끈다. 나머지 그룹 내 회원들은 책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 과정에서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모범답안’이 정해져 있는 입시논술과는 달리 ‘수유+너머’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답안을 찢어버릴 만한 날카로운 글, 논술이 아닌 논쟁적인 글을 생산해내기 위한 훈련이며 통상적인 글이 아닌 자기만의 글, 개성이 담긴 이야기를 지향한다. 회원들은 이를 통해 ‘글을 잘 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글을 쓰고 써온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하며 더 좋은 글을 만들어 가기위해 노력한다. 토론 도중 서로 야박한 지적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대의 좋은 의견에 격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더욱 심화된 생각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들이 공부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학문과 학문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한 학문에 대해서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역사, 문학은 물론 동서양 고전과 자연과학, 한의학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사유의 날개를 펼친다. 고전철학을 따로 하고 현대철학을 따로 하는 것도 아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과 20세기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가 시공을 뛰어넘어 초대된다. 그런 열린 자세는 ‘수유+너머’의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없이 ‘개방적’ 공간일 것 같은 ‘수유+너머’에도 하나의 규율이 있다. 지각이나 결석을 절대 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전에 회원들끼리 서로 동의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공부는 완전히 자율적일 수는 없다’는 ‘수유+너머’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수유+너머’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보다 ‘얼마나 성실하게 임했느냐’를 더욱 미덕으로 여긴다. 성실한 마음가짐을 통해서만이 참된 공부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유+너머’의 아이디어를 교실이라는 공간에 적용시켜 보자. 아이들은 자신이 배우고자하는 분야에 대해 벽보를 붙여 홍보할 것이다. 이를 통해 몇 명의 아이들이 모이면 하나의 공부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하나의 공부공동체에는 교사가 배치되어 보조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미래의 교사인 ‘나’는 이 그룹에 흥미를 갖는 다른 학생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신청을 받는 일이나 그룹이 완성되어 본격적으로 공부가 시작되었을 때 학생들이 결석, 지각하는 것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현재의 초등학교 현장에 비해 교사의 역할이 대폭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룹 내 아이들은 회의를 통해 배우고자하는 분야에 관한 책을 읽어온다. 그리고 학생들 중 발제자 한명을 뽑아 매주 토론을 이끌게 한다. 이러한 토론 과정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의 미성숙한 사고는 한층 더 고차원적으로 발전하게 되며 결론에 이르러서는 고도로 성숙된 생각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토론 과정이 끝나면 토론 한 것에 대해 각자의 소감을 발표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물론 초등학교 아이들은 ‘수유+너머’의 성인회원 정도로 사고력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토론 중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나’는 토론이 주제를 벗어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바로잡고 아이들이 더욱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토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그 외의 전반적인 것들은 모두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총 2~3회의 토론이 끝나면 학생들은 다른 형식으로써 이 주제를 접할 기회를 갖는다. 주제와 관련된 영화를 감상하거나 직접 체험학습을 가는 것을 통해 언어를 주고받던 것에 머물렀던 생각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게 된다.
‘수유+너머’가 여느 연구소와 달리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동고동락'한다는 점이다. 회원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소에서 먹고, 놀고, 공부한다. 잠만 각자 집에서 따로 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연구 코뮌'이라고 부른다. 공부와 생활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대개 세미나나 강좌에 참여하러 왔다가 함께 먹고 놀고 공부하는 생활에 매료된다. ‘수유+너머’의 공간은 총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방마다 용도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칸막이를 치거나 빼면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밥 먹는 공간인 식당은 놀이시설인 강당과 체육관을 겸하기도 한다. 겸한다는 것, 어울리지 않은 것들의 조화를 이곳에선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식탁보를 벗겨내면 어떤 것은 책상이고, 어떤 것은 탁구대다.
이러한 활동들은 재량활동시간이나 방과 후 활동을 이용하여 이루어질 수 있고, 좀 더 그 효과를 인정받게 된다면 자체적인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수유+너머’에 비해서 시공간적인 제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누군가는 헛된 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수유+너머’에서처럼 진정한 배움을 꿈꾸는 학교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 학교에서는 모든 고정된 교실은 사라지게 되며 학교는 하나의 생활학습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아이들은 공부하던 곳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뛰어놀던 곳에서 오늘 토론한 주제에 대해 탐구한다. 이처럼 학교 내 모든 공간은 다른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배우고자하는 주제에 한발 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이제껏 등한시되었던 놀이의 공간인 운동장이 배움의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아이들은 일상생활과 다름없이 움직이면서 공부를 하게 된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은 순간에도 많은 배움이 일어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연스러운 공간 어디든 생각이 깨어나게 된다.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시간과 공간마저도 이처럼 상대적일 수 있다. 인간과 인간, 관계와 관계가 부딪치고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게 된다. 공부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움은 교실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 모든 것이 공부다. ‘즐기면서 하는 공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참된 본질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갈아놓은 밭에다 씨를 뿌리기만 하는 것 같다. 씨앗이 충분한 시간을 거쳐 싹이 자랄 때까지의 시간을 결코 기다려주지 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물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속가능한 배움이 있기 위해서는 거름을 주고, 물도 주고 적당한 햇빛을 비춰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즉 자신을 위한 수양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공자는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을 위해 한다.’고 하였다. 이것에서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이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다.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학문이고, 위인지학은 남을 위한 학문을 뜻한다. 사람들이 자기개발에 가치를 두고 자아 수련을 통한 자아 확립을 목표로 하는 학문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위한 학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위한 공부, 내가 즐겁기 위해서 하는 공부는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나는 이에 대한 대답을 ‘자기 흥미’와 ‘실생활과의 관련성’이라는 점에서 찾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면 배움이 즐겁지 않을까? 너무 추상적이어서 이것이 도대체 어디에 쓰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배운다면 더욱 즐겁지 않을까?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것들이 교육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면 이야말로 이상적인 교육이 아닐까? 나는 ‘수유+너머’를 통해 이 두 가지 것들을 모두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이전의 교육과정을 통해 성장한 어른들의 경우 ‘수유+너머’의 회원들과 같이 배움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들 눈에는 나의 꿈 또한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어쩌면 현실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꾸지 않는다면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교사라면 더 나은 교육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더 나은 아이들의 미래를 꿈꾸어야만 한다. 이전에 공교육을 접해본 적이 없는 초등학생의 경우 더더욱 현실 가능한 꿈이 될 수도 있다. ‘수유+너머’가 8년 전 고작 몇 명의 회원으로 시작해 현재에 위치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의 교육 또한 작은 바램들이 합쳐져 배움을 위한 배움, 즐거워서 하는 배움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