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대를 왔던 당시가 떠오른다. 고3 당시 부모님과 진로로 인해 잦은 다툼이 있었다. 난 절대 교대에 오고 싶지 않았다. 왜였을까. 그때 내가 배우고 싶었던 과목은 철학, 고고학 부분이었다. 당시 윤리, 지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을 더 심도 있게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대학을 결정한다는 것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은 자꾸만 너의 편한 미래를 위해라는 말을 반복하며 교대에 갈 것을 강조하셨다. 도대체 편한 미래가 뭐길래 나를 이리도 압박하며 괴롭히는지. 편한 미래 속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체 정처없이 앞으로만 걷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너무 싫었다. 더군다나 입시를 준비할 때 나는 교대에 들어와서 배우는 과목이 뭔지도 몰랐다. 부모님께 여쭤 봐도 그냥 가르치는 것을 배운다는 애매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뭘 배우는지도 모를 곳에 가서 나의 캠퍼스 생활을 바쳐야 되다니. 교대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
이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선생이 되고 싶지 않아서가 가장 큰 것 같다. 나는 애당초 사대 쪽으로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초, 중, 고 가리지 않고 그냥 선생의 직업에 거부감 느꼈었다. 사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와서 대학까지 나의 학업 생활 속에서 접촉이 많은 사람 중 하나가 선생님이다. 학교 속에서 항상 선생님과 멀고도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내 삶에 항상 존재하는 일부였다. 지금 나는 왜인지 모르겠으나 여러 선생님이 하셨던 수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선생님이 학생에게 대했던 태도, 수업의 방식 등은 기억이 또렷하다. 그 기억 속을 헤집어보면 몇몇 선생님은 항상 교과서를 읽어주는 수업을 하셨다. 무서우셨다. 피곤해 하셨으며, 화를 많이 내셨다. 공부 못하고 논다고 소문난 중학교에 갔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인기가 많았던 고등학교에 갔다. 12년 동안 학교를 중점으로 살았지만 수업이 재밌었던 적, 내가 수업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을 뽑으라고 하면 굉장히 몇 안 된다. 학교가 배우러 가는 곳인 것은 알지만 학교를 다니는 내내 내가 왜 여기에 앉아있을까 생각을 들게 하는 선생님도 계셨다. 아마 이런 무의식들 때문에 나는 선생님을 일반화시켰던 것 같다. 지루한 직업, 무시당하는 직업.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현재 교대에 와있는 나도 이 과정을 밝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선생님들께서도 아마 처음부터 교과서를 읽고, 아이들에게 화만 내는 분들이 아니셨을 테다. 예비 교사 당시에는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고, 교단에 나가 좋은 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분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교육자로서의 포부를 가지고 학생들 앞에 섰지만, 자꾸만 예측할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 많은 재구성들, 거침없는 몇 분의 학부모 등을 거치며 현실에 지치고 자신도 모르게 타협하셨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현실 속에서 꺾이지 않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의 확고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비전을 중심 기둥으로 세우고 여러 풍파가 들이 닥쳤을 때 이를 잡고 버틸 수 있도록 우리는 언제나 그 모습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어떻게 되었든 나는 교대에 왔다. 처음의 시작이 좋은 의도가 아니였다 한들, 억지로 시작했다 한들 끝마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현실에 타협한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바뀐 것일까 모르겠으나,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가끔 수업을 듣는 내 모습을 보며 참...이러면 안 되는데 나부터 수업 태도가 좋아야하는데 하고 반성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심리를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내가 미래에 교단에 섰을 때 아이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니 나는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의지는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 기회에 내가 생각으로만 하던 선생님의 모습을 글로 적어봐야겠다.
아이들에게 절대 공개적으로 혼내는, 과하게 혼내는 선생님이 되지 않겠다. 아동에게 수치심, 창피함은 굉장히 크게 작용한다. 친구들 앞에서 무안을 받는 일은 그 아동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거나 반항하게 만든다. 이는 내 주위를 보고도 알 수 있고, 내가 겪어본 일이기도 하다. 또한 너무 과하게 혼나면, 선생님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게 된다. 이런 감정이 생기면 선생과 아이는 상호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나는 교사와 제자 사이의 관계 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편하고 기댈 수 있는 사이를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다. 예를 들면 아침 인사로 선생님이 아이를 한 명 한 명 앉아주면서 시작하는 방법이 있다.
학생이 생각하는 수업을 만들겠다. 사실 내가 가장 힘든 부분이 될 것 같다. 교단에 서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수업을 대충 때우려 할 수도 있다. 자꾸 ‘그냥하자...’라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합리화시킬 수도 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자꾸만 상기시킬 것이다. 나 하나로 1년에 30명의 아이들이 웃고 운다는 것을. 아이들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평생 간다는 것을. 아이들이 재밌어하는 수업 만들기. 제일 원하는 부분이다. 학생이 웃으며 참여하는 수업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한 공부를 계속할 것이다. 선생님이 된다면 꾸준히 수업을 분석하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평생 교육원 등에서 공부를 시작해볼까 한다. 재밌는 수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경험, 지식이 많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알고 익혔을 때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초등 교과의 경우 한 과목의 깊이가 얕기 때문에 여러 과목을 융합하여 수업을 하면 과목간의 괴리가 없이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 교실이 융통성 있게 돌아가야 한다. 교실을 넓게 만들어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면 좋겠다. 정형화된 책상, 의자에 앉아 필기만 하는 모습이 아니라 교실에 선생님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음악을 배우는 모습, 지리의 모형을 만들어보는 미술, 사회 통합 수업 등등. 이런 모습을 이루고 지키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마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이고 이를 내가 찾아서 해야 한다는 것에 귀찮음을 느낄 것이다. 지금의 대학교에서는 선생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선생님이 최소한의 것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각하고 이를 깨치기 위해 실천으로 실현했을 때 비로소 선생님의 틀이 잡힌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교실에서 아이가 웃는 모습을 생각하며 선생님으로서의 꿈을 다질 것이다. 부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선생님이 되길... 후에 이 글을 읽으며 선생의 비전을 곱씹어보는 태도를 지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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