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선언

음악교육과 도지수

미래 교육 2017. 6. 18. 18:28

  도지수론 교육편


  나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책을 읽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만들고, 하는 개인적 창작활동을 좋아한다. 내게 선생이라는 것은 아이들이라는 원천적인 상상력의 샘들 가까이에서 머무르며 끊임없는 자극을 받고, 아이들과 나를 동시에 사랑으로 성장하게 하며, 그러면서 창작할 수 있는 여유를 충분히 주는, 유토피아적 직업일 뿐이었다.

그러나 2학년, 교육봉사에서 나는 다른 세상을 만났다. 아동센터에서 ‘Student’를 못 읽고, 통분 개념도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채 소금 농도 문제를 풀고 있는 중학생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금씩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현대사회에서 초등학교는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그 아이들은 초등학교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의 방관, 선생님들의 무관심이 만들어낸 철저히 외면된 결과였다. 아동센터에는 전주교대를 비롯한 수많은 교육 봉사하는 대학생들이 오갔지만, 그저 진도 나가기 바빠서 아이들이 어디서 막혔는지도 살펴주지 않았다는 그 점에 기가 막히고 그게 현교육의 현실이며.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에는 다 내려놓았다.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봤다. 역시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숙제로 가장 멋져 보이는 직업, 평생해도 이걸 하면 즐겁겠다, 행복하겠다 싶은 직업을 무엇이든 가져오라 했다. 그러자 중3짜리 2, 1짜리 4명이 각자 알아서 꿈을 찾아왔다. 소방관, BMX라이더, 일러스트레이터, 코미디언, 자전거 설계사...다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때부터 소방관 목표인 아이들에게는 소방공무원(그전에 의무소방관) 시험 준비 겸으로 국어, 국사를 가르쳤다. BMX는 국내기반이 매우 취약하기에 해외로의 진출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어를 가르쳤다. 나머지 아이들도 자신이 필요한 것을 가르치니 그제서야 듣기 시작했다.

다시, 초등학교는 필요한가? 아이들은 모든 과목을 하기 싫어하고, 학교를 싫어했다. 그들에게 학교는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공간이었고, 그저 감옥에 불과했다. ‘모든 걸 다 준비해서 다빈치형 인간을 완성해놓으면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어떻게 든 하겠지.’ 우리나라의 교육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방관적 기본 철학이다. 왜 모두가 모든 걸 다 잘해야 할까? 그렇다고 모든 걸 다 잘할 수 있는 걸까? 다빈치가 대체 세상에 몇이나 필요할까? 아이들에게 높은 기준을 강요할 권리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것이 아이들의 귀중한 시간을 다 까먹을 만큼 숭고한 목표인가?

아이들에게 필요 없다면 학교 따위는 없어져도 상관없다. 아이들에게 필요 없는 선생은 존재할 의미가 없다. 아이들에게는,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걸 배우지 않을 권리가 있다. 진정한 교육 같은 게 있다면, 그건 선생님이 정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이 정해야하는 것이다. 학교는 너무 허울만 좋은 기관이다. 실질적 학교는 보육원의 확장된 개념일터, 이를 가지고 뭔가 숭고하고 굉장한 일을 하는 듯이 꾸미려하는 교사들의 행태는 허황된 철학놀음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 허울이 아이들을 행복하게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고 있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

교과란 어차피 잊어버릴 교육이다. 모두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같은 내용을 중학교에도, 고등학교에도 다시 배우지 않을 것이다. 이번 시간에 한 것을 다음 시간에 복습하고 머릿속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어차피 선생님의 손이 닿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이다. 오늘 알아도 내일 모를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학교가 해야 할 일이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호불호를 길러주는 정도의 일이. 아이들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어떤 것을 더 하고 싶고, 어떤 것이 더 즐거운지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학교가 해야 할 유일한 의무이다. 쓸데없이 아이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조성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어야 한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살아있다. 그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지만, 대다수의 교사들이 세상 살다보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할 때가 있다.”라고 합리화하며 자신들의 비효율적인 인생을 내리물림하고 있다.

그 만성적인 교육의 적폐는 안정성에서 비롯된다. 실질적으로 안정적인 자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현대인들은 척수 반사적으로 집착을 이어간다. 안정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무료이며, 일탈의 시작이라는 것을 간과한 채로. ‘강남 엄마들이 준비할 수 있는 사회가 문제이다. 그녀들은 아이들이 조금만 더 안정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하길 바라고, 이를 통해서 어떤 희생도 불사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자기 아이를 희생해가는 한이 있어도 안정성을 추구하는 너무나도 심지 굵은 위인들이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 정답은 박살내는 것이다. 모든 안정적인 교육적 형태를 부정하고, 타파하며, 각자의 교사가 스스로, 꼴리는 대로 교육하는 것이다. 과거의 시대까지 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각양각색의 멀티미디어들을 통해 모든 개념들의 경량화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는 점점 가벼운 분위기로 흘러간다. 한없는 무게로 청년들을 옥죄던 애국심헬조선, 국뽕이라는 가벼운 조롱들로 이미 시들었고, 굳어져있던 남녀차별과 앙금은 혐오라는 시시콜콜하지만 제법 신세대적인 방식으로 매듭지어져가고 있다. 현대사회의 혁명은 시시하고소소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수도없이 일어나고, 빠르게 변화한다. 교육은 왜 빨리 변화하지 못하는가? 못한다고? 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교육도 빠르고 정신없이 바뀔 수 있다. 변화와 교육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만 제공 된다면 가능하다. 개나 소나 선생님이 될 수 있는 때가 도래한다면.

교직 전문성’, ‘전문가로서의 교사는 허울에 불과하다. 전문성이 있다고 해도, 이는 배워서 길러지기보다 부딪히면서 길러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가르칠 권리를 교사만이 얻는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속임수이며, 어쩔 수 없이 굳어진 사회적 습관에 속한다. 교육이라는 것은 숭고하다는 거짓말.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교육에 의한 것이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파괴이다.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바로 없애는 것은 감정적 해결에 가까운 것이며, 불가능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비효율적이다.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는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없으면 학교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학교는 자기자신이 존재할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저 관계적 개념이다. , 학교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만나는 곳일 뿐이지, 그 이상 학교 자체에는 어떤 의무도, 짊어질 그 어떤 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학교에서 숭고한 의미를 입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소영웅을 동경하는 마조히스트적 취미이며, 자승자박의 형태로 자기자신을 몰아넣는 모습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공교육은 본래 공장에서 사람들을 사용하기 위해만들어졌다. 인간의 도구적 가치를 강조하는 단순한 톱니바퀴 생산소였다. 더없이 반 칸트적이었던 시절에는 그랬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본래의 공장으로서 학교의 의미가 희석되었고, 사람들은 사람 되는 곳’, ‘공부하는 곳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머릿속에 정착시켰다. 하지만 그 형식 자체는 공장 교육의 전통을 떨쳐내지 못했고, 여전히 같은 형태의 인간들을 찍어내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수많은 교육이론과 학교에 대한 말들은 그 위대한 학교의 형식을 치장하느라 시간을 보낸다. 옛 의미를 버리고 새 의미를 찾아가는 와중에, 아무 의미도 없어져버린 현대교육은 어찌 보면 어리석음의 잔재로 보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기회의 공간이다. 그 비효율성을 제외하고, 학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자재들과, 그 시스템, 또한 이에 맞는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교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파괴보다는 실존적인 재구성이다.

학교는 대표적인 사회화기관이란다. 사회화라는 것은 어떻게 살 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살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어떻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사회 속에 녹아들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학생은 언제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회에 섞였던가?

학교에서 배운 거 다 쓸모없더라.” “대학교 다녀봤자 배운 건 술 마시는 거 밖에 없더라.” 참 일상적으로 듣고 사는 말들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교육이 피교육자들 대한 사회화를 실패했다는 가장 기본적인 반증이다. 막상 대학교 와보니 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여차여차해서 적응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지만 뭘 위해서 이걸 하는지는 모르겠고, 일단 옆 사람도 옆옆 사람도 다 하니깐 하자. 현 대학생들의 현주소이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의 잘못인가?

학생들은 그저 상상력이 없었으며, 그 상상력을 받쳐줄 지식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지식을 가지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에는 12년 동안의 생고생을 보상받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하다.충분히 노오오력을 했기에 더 이상 노력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현대의 청년들은 자기반성도 철저하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잉여인생인지 논평할 수 있으며 숭고한 취미를 덕질이라 격하시키고, 서로에게 앰생이라는 고급진 단어로 위로할 줄 안다. 현 세대는 배신당했다. 대학에 가면 앞날이 준비될 줄 알았는데 들어와보니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전 세대의 신화와 술 몇 짝만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교수들도 자기들이 무엇을 왜 가르치는지 모르고, 자신이 가르치는 게 어느 짝에 쓸모 있는 지도 모르고, 일단 가르칠 뿐이며 어지간하면 쓸모없는 지도 모른다. 대학생은 지식에 대해서 더욱 무지하며, 이를 논할 자격자체를 포기한다. 그러려니하고 넘어간다.

결국 이 시대 교육은 12년 동안 책상에 앉아서 지식으로 계모임하는 것이다, 차라리 폭동으로 가득하고, 모두가 분노로 자신의 의견을 토로하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며, 서로 속이고 죽이는 싸움이 계속되었으면 아무도 배신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시대의 진정한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현 세대를 배신했는가? 우습게도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런 분위기에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왠지 원서를 써야할 것만 같은 분위기, 왠지 대학에 가야할 것만 같은 분위기, 왠지 좋은 회사에 입사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 좋은 대학이, 좋은 회사가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혹자는 외쳐대도, 사람들은 분위기를 따를 뿐이다. 이 분위기를 사회의 영향력따위의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개인들이 만들어낸 분위기이며, 줏대 없음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역시 결국 학교의 역할 부재에 대한 증거이다.

학교는 작은 사회라고 불리나, 실제로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학교에는 규율이 있으며, 타임테이블이 있으며, 이를 따르며 얻을 수 있는 안정감 또한 존재한다. 루틴Routine이 있다. 반면 사회 안에는 법이라는 규율이 있지만 이에 대해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은 드물며, 타임테이블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안정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만들어가야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수많은 가능성 속으로 그저 던져진 아이들은 학교가 가려두었던 수많은 사회의 더러운 부분들,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던 것들, 속인 듯 안 속인 듯 인정되는 것들 사이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대체 학교에서 뭘 배웠지라고 울부짖게 된다.

그러므로, 학교가 목표로 행해야하는 것은 사회에 근접하는 것이다. 한없이 사회에 가깝기에, 졸업 이후 돌아보았을 때 학교 다니는 것과 학교 다니지 않는 것의 차이점을 분간하기 힘들다고 생각되었을 때, 학교는 완전한 사회화를 마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나는 학교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에 대해 고심하고, 꿈꾸고 있다. 그럼, 학교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가. 이를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논해보도록 하겠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시끌시끌하다. 30년에 한 번씩 직업을 바꿔야하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직업을 창출해내고, 틈새시장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이 흐름에 따르면, 모험이 일상화된 시대가 올 것이고, 모험에 익숙해지려면, 가벼워져야한다.” 현재 학교의 형식은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무겁다는 것은 변화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원인은 다양하게 찾을 수 있다. 학교가 많은 이들에게 기대 받는다는 증거이며, 신뢰받는다는 것이고, 그만큼 사공이 많다는 뜻이며, 또한 그 안에 상당한 왜곡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국어도 영어도 사회도 과학도 실과도 도덕도 컴퓨터도 그자체로 고귀하거나 존속의미가 있는 것은 없다. 그저 도구일 뿐이고, 그 많은 도구 중에서 조금 더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도구 이상의 귀중품으로 여기는 순간, 포기하기 힘들어지고, 변하기 힘들어진다.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진다. 학교는 사회만큼이나 변화무쌍해야한다. 학교는 사회를 닮아가야 한다. 사회화라는 자신의 존재의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과목과 학교는 경량화 되어야 한다.’

교육 경량화는 교육내용을 산발화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교육이 바뀌기 힘든 것은 교육이 매우 중앙 집권적이다. ‘공교육의 발전이라는 말은 그자체로 상당한 모순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 바뀌기 힘들다면,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다. 공교육의 친구는 바로 곁에 존재한다. 현재 사교육 시장은 공교육 시장의 몇 배 이상의 자본이 돌고 있다. 개나 소나 교육을 할 수 있는가? 이미 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교사의 나라다. 과외로, 인터넷 플랫폼으로, 수많은 학원들, 인강 강사들. 모두들 한번 씩 가르치고, 배워보았다. 공교육의 신봉자들은 마치 진정한 교육은 공교육에서 비롯된다는 듯 여기지만, 실질적으로 아이들이 존중하는 선생님들은 공교육이 아닌 재수학원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유명 재수학원에는 걸러지고, 경쟁해서 결국 좋은선생님들이 남는다. 그들은 옳거나 바른 선생님들이 아니다. 그저 잘 가르치고, 잘 듣고, 잘 말할 뿐이다. 이 수많은 좋은선생님들을 있는데 학교는 무엇을 하는가? 공교육이 사교육의 넘치는 재원들을 흡수정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육이 학교의 책임이 아닌 사회전체의 업무로 책임으로 여겨줘야할 것이다.

이상적인 학교는 사회학교이다. 교육이 모두의 책임으로 맡겨지는 곳, 모두가 모두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는 곳. 만인이 선생님이 되고, 한 아이가 수 백 명의 선생님들에게 수 백 명의 방향성과 철학을 배울 수 있는 곳.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이들이 각자각자 자기 자신의 선생님으로 자라나는 곳. 치킨집 사장과 수학자와 청소부와 판사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곳. 학교같은 사회, 사회같은 학교가 가르치는 곳,

선생님이란 직업은 모든 방면에 대해서 부전공자이다. 이를테면 수학교사의 전공은 교육이다. 수학은 교육을 거들 뿐이다. 수학교육학과를 진학하는 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반대로 수학과는 수학 자체가 좋아서 가는 것이다.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것은 한마디와 반복으로 끝납니다. 수학을 가르치는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수학의 어디가 좋아할 만한지를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을 가르쳐야 한다. 전공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르침으로서, 아이들이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취향교육혹은 호불호교육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옳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오로지 취향만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선택할 때도 옳은 것이나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취향을 따라 선택할 뿐이다. 궁극적인 선이나 악 따위는 그 누구도 구별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누구도 정의를 계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르쳐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지식도 완전하지 않다. 어떤 지식도 옳거나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선생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다. 아이들이 특정 경험을 마주하고,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파악하고,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선생님의 전부이다. 요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지식을 판단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전공자들에게, 즉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아이들에게 지식과 체험에 대한 영역을 떠넘기자는 이야기다. 그러면 교육론을 배운 교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들은 두 가지만 하면 된다. 컨설턴팅카운슬링이다.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 되고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아이들은 갈피를 잡아줄 이들이 필요하다. 우선 아이들과 선생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가르침을 지휘할 사람, 아이들이 하나 둘씩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찾아나가면, 그것에 맞추어서 아이들의 경험을 조작할 수 있는 메타티쳐Meta-teacher가 요구될 것이다. 그들이 하는 것이 컨설턴팅이다. 결국 인생이란 자기자신을 컨설턴팅하는 것, 메타교사들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할 것이 이를 통해 후에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선생님을 찾고, 자신들의 지식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에서 가르침이란 먼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야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다가가고 도전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회 구조속에서 배운 것을 정리하고, 되돌아보고, 다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수많은 경험들에 아이들이 심적으로 정리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이또한 학교교사들의 담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 이를 리마인딩하고, 서로 경험을 나누게 하고, 피드백해주고, 정리하게 도와주고, 감정적으로 케어해주는 것. 교실의 큰 역할 중 하나인 아이들을 사랑해주는 역할이다. 이것이 카운슬링이다.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이들의 반응을 파악하고, 이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감정적으로 안정화하는 것. 궁극적으로 인성적요소들을 관리해주는 것이 카운슬러로서의 교사들의 역할일 것이다. 교육을 사회의 책무로 돌리면서, 교사들은 본격적으로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인성과 사회성은 사회에서 구르면서 배우는 것들이다. 이렇게 행동하면 손해를 보고, 이렇게 행동하면 이득을 보는구나. 이렇게 하면 상대방을 상처를 입히게 되는구나, 와 같은 것들을 습득하고, 감정적 이득과 손해에 대해서 기민하게 되는 것. 이를 품위 있게 우리는 예절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아이들은 상처도 입을 것이고, 충격도 받을 것이며, 문제상황도 다양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울 것이고, 항상 제 자리에 있는 학교교사(담임교사)에게 돌아와 자신이 느낀 것을 나누며, 아이들은 한층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워야 할까. 단 네 가지이다.

 

1. 생각하고 2. 고민하고 3. 꼴리는 대로 4. 선택하는 것.

 

이 네 가지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당연한 것이지만, 훈련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벗어난 것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부르고, 오로지 습관으로만 사는 이들은 짐승에 불과하다. 단순히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고민을 할 때도, 1. 짜장면과 짬뽕이 어떤 음식이고 나에게 어느 정도의 칼로리를, 만족감을 줄 것인지 생각해보고, 2. 정말 내가 지금 생각한 이것이 맞는 추론인가를 파악하고. 3.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를 파악한 후 4. 마음가는 대로 선택하고 후회없이 맛을 즐기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이다.

이 작업은 어떤 과목에도 대입가능하고, 이를 포함하지 않은 행동은 그저 습관적인 지식의 습득, ‘암기일 뿐이다. 까먹기 위해 머릿속에 구겨 넣는 시간낭비. 그런 것들에 아이들의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그들의 가능성은 너무나도 크다. 현재의 학교는 아이들의 시간을 과도하게 낭비하고 있다.

학교는 사회를 닮아가야 한다. 또한 사회는 다시 그 학교를 닮아가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어느 정도 보호를 받습니다. 사회를 나가기 전에 그들은 학생이라는 이름의 가능성을 얻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볼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서 그들은 방치됨을 느끼고, 아무도 그들의 편이 없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상사회의 가능성을 학교를 통해 확인해야 할 것이고, 발전하는 학교를 사회에 대응해,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학교의 조정원리를 통한 사회의 발전, 사회의 자유원리를 통한 학교의 발전. 이는 대응 원리의 긍정적 적용이다. 학교와 사회의 상호대응을 통해 발전의 연쇄를 이어나가는 것. 최종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회의 모습이다.

 

이런 주장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녔다. 이 과감한 학교해체론을 주창하기 시작했을 때, 교육과정 수업의 기말과제를 받았다. 놀랍게도, 이 과제는 내 생각의 방향을 한 번 더 완전히 틀어놓았다. 과제는 이와 같았다. ‘돈과 자원을 무제한으로 제공한다고 할 때 당신이 만들고 싶은 이상적인 학교를 구상해보시오.’

그때 구상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

 

교육지구Edu-city 계획

 

 

사실상 이상적 교육과정은 이상사회 속에서 적용될 수밖에 없지만, 이상사회에 대한 구상까지 포함하기에는 여백이 부족하므로, 적당히 열린사회라고 가정하고 들어가겠다.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을 왜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다시 배우는 걸까? 잊었기 때문이다. 반복학습을 통한 체화라고 말하면 듣기야 좋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과연 그들이 배웠던 과목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억하면 어떤 일에 쓸 수 있을까? 과외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모든 학습은 잊히는 것을 상정하고 이루어져야하며, 조금이라도 덜 잊힐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한다. 혹은, 어차피 잊혀져버릴 학습이라면 좋은 추억으로라도 남아야한다. 본 교육과정에서 학교란 숭고한 이상을 성취하는 학문의 장이 아니다. 현실이고, 일상이며, 탁아소의 연장선이면서, 처세술의 연습장이다. 토론하고, 싸우고, 속이고, 화해하고, 다시 배신하고, 회복하고, 꿈꾸고, 성취하고, 실패하고, 도망치는 그 모든 것들이 녹아있어야 한다. 본 교육과정에서 목표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세간에서 좋은 것나쁜 것이라 불리는 것들을 모두 가르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초등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는 수식이 붙어야겠지만, 그 나이 대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학교의 가장 딜레마는 각자 가장 잘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생님들이 가르치기 위해서 먼저 배워야한다는 것은 심각한 비효율성을 낳는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시도 되어야할 것은 학교로서 있게 하는 것들Grammer of Schooling을 부정하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두 가지, 사회화와 개인화이다. 사회와 세계의 구조를 아는 것, 타인과 관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회화라고 부를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개인화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학교를 다니는 행위를 사회화와 연결지으며, 학교는 작은 사회라는 것이 통념이다. 사회화가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사회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실제적, 실용적 교육을 위해서는 학교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 무한한 지원과 재력을 통해서라면 사회의 학교화가 합당하다 수 있다..

학교의 해체, 동시에 사회가 학교가 되는 공간, 이를 나는 교육지구Edu-city라 부르겠다.

 

교육지구는 미성년 자치지구로서, 별개의 장소가 아닌 일반사회 내에 어우러져 있다. 교육기관 자체의 실체가 뚜렷하지도 않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도시, 마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학교라는 개념 자체를 잘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도시에서 시작된 교육지구는 점점 범위가 넓어져 범국가적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예비 사회’, ‘소사회등의 별칭이 있으며, 현재, 국가별로 호칭을 통일하자는 여론이 대두되고 있다. 현재의 학교와 비교하자면, 일반 사회 속의 모든 건물들이 학교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이루어졌을까

교육지구가 설정되었을 때, 국가 차원에서 기업체마다 어린이 인턴 부서를 설치하도록 법제 의무화되었다. 단순히 기업체가 운영하는 사기업 학교들이 아니라, 모든 경제 활동을 하는 자들은 바라는 모든 학생들에게 교육할 의무가 있다. 교육지구가 바탕으로 삼는 에듀토피아Edutopia 정책은 그것이 누가 되었든지 가르칠 의무배울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교육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성인과 학생들의 역할은 선생님이다. 모두가 모두에게 교육 신청을 할 수 있는 곳, 그곳이 교육지구이다.

‘UN 교육지구 협정을 맺은 국가의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프리인턴 과정의 대상자가 된다. (프리인턴 과정은 일반 성인의 인턴과정과 분리되어, 어린이총회 관할 아래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소사회mini-society 소속이 되는 것은 본인이 선택을 할 만한 정신이 형성되었나에 달려있다. 이 성장 정도의 여부는 가족들의 의향에 따라 정해진다. 하지만 분위기상 대체적으로 아이들은 일찍 사회에 진입시키려는 부모들이 많은 편이다. 연령대에 따라서 확실히 나뉘지는 않지만, 학생들은 -선택 단계(영아), 선택 단계(유아), 입학 단계(학생)로 나뉘어진다. 소비자들의 심리가 크게 좌지우지되기에 대기업들은 어린이 인턴 사업 쪽에 있어서 계속 인프라를 늘려가는 중이다. 대표적인 예로 베이커리 계열의 매장은 영아들을 위해 밀가루를 이용한 놀이, 유아들을 위한 기본적 요리시간, 학생들을 위한 베이커리 운영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차원이 되면 대부분 그 장소 자체를 마케팅하는 방법을 배워나가게 된다.

 

경제

교육지구 내에서는 교육지구의 화폐(에듀러Edu-llar)가 유통된다. , 일반사회의 화폐와는 환전이 엄격히 금지되어있다. 프리인턴 과정에서 비롯되는 모든 경제적 활동은 교육지구 화폐를 통해 진행된다. 모든 아이들은 프리인터 과정에서 생산된 재화와 화폐의 유통과정을 통해 경제적 개념들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고, 경제 개념들의 학습은 대부분 먼저 인턴과정을 경험한 선배들을 통해 배우게 된다. 화폐가 유통되면 반드시 그 안에 부정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기본적인 사기 방법이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배우고, 그 대처방법 또한 토의해서 알아낸다. 범죄 행위에 특출난 재능이 보이는 학생은 어린이 총회 하에 그 행위에 대한 전 학원 범위의 특강을 열게 하고, 그 대처법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교육지구의 기본 철학

 

란 지극히 개인적 취미이다.

좋은 인간이란 없다. 오로지 나에게 좋은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결코 진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때때로 진지함을 연기할 수는 있어야한다.

만약 교육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제적이고, 노골적인 것이어야 한다.

무지無知또한 지극히 개인적 취미이다. 앎에 있어 당위란 없다.

깨닫거나, 느끼지 않는 모든 행동은 무의미하다.

예절과 도덕이란 없다. 오로지 실리와 가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성실히 계산해야할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 어느 누구에게라도 당당히 비판할 수 있어야한다

그럼에도 모든 행동 중에서 사랑이 우러나오는 행위가 가장 바람직하다.

 

커리큘럼

 

모든 학습과 수업은 자율로 이루어지고, 자신이 얼마나 학습하고 있는가, 무엇일 배우고 있는가도, 스스로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월요일 오전 시간만은 커리큘럼적으로 강제되는 시간이다. 자신들의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구성하는 시간. 목표를 설정하는 시간이다. 단순히 관심분야를 설정해라라고 말해도 애매하기 마련이다. 이 시간에는 교육지구의 통합적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위키wiki식 탐색을 시도한다. 선배들이 먼저 시도했던 프로젝트들과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이 모아져 있는 중앙 아고라Agora에서 정보를 찾고, 선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사전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꼬리와 꼬리를 무는 정보를 수집함으로서 궁극적으로 맘에 드는 아이디어를 하나 설정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볍고, ‘막 던진질문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냄새나는 책은 어떻게 만들까?”, “가장 가벼운 자동차를 만들어 보고 싶다.”, “날개 없이 어떻게 날 수 있을까?”와 같은 아이디어를 던지면, ‘조력자들을 통하여실현시키는 것이 목적에 있다.

교사들의 역할은 극히 축소되어, 길안내 요원, 학생이 주도의 행정업무 보조, 그리고 이 프로젝트 학습의 컨설턴트의 역할로 한정되어 질 것이다. 프로젝트 학습 컨설팅은 학생들이 던진 질문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그 학생이 이전에 했던 프로젝트들과 연결시켜 연속적인 학습효과를 낼 수 있을지 찾고 학생에게 조언하는 역할이다. 어디까지고 조언자의 역할이지 학생을 앞에서 이끄는 역할로 나서는 것은 바람직 못하다고 판단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한다. 비록, 실패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 프로젝트형 학습의 초점은 첫 번째,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는 훈련, 두 번째, 아이디어를 현실로 가져오는 훈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디어를 현실로 가져오는 것에는, ‘이것을 실현시킬려면 어떤 작업, 어떤 사람들이 필요할까와 같은 질문들에 대답이 여기에서 선생이 되던지, 선배가 되던지, 나름의 도움을 줄 멘토가 필요하다. 이러한 조력자들을 어린이 총회가 배정하고, 일반사회와 연계하여 상업화까지 시도하는 것이 기본적인 흐름이다.

90% 이상이 실패하기 마련이지만, 보통 일주일 단위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이기에 실패를 가볍게 여기는 풍조 속에 아이들이 다시 시도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 작업을 반복하고, 좀 더 나이가 들수록 조금 더 장기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협력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학생은 자연스럽게 사회의 주요 기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입학 졸업.

 

교육지구는 제법 안정된 상태에 있다. 분수대 앞에서 이루어지는 입학식은 말이 입학식이지, 먹고 즐기는 파티이다. 입학식과 졸업식 자체가 특별한 의미는 가지지 않는다. 그저 예비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파티는 어린이 총회(지역-전국-세계)에서 주최한다. 입학하게 된 아이들은 실질적으로는 입학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학원 자체의 실체가 뚜렷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이 살아온 마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학교라는 개념 자체가 애매한 아이들이다.

입학이 확실치 않았듯이, 졸업 또한 확실치 않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어린이 경제체제에서 외부 경제체제로 눈을 돌리게 되고, 그 안으로 흡수되곤 하기에 언제든지 졸업을 하고 싶을 때 졸업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물론 필요하다면 재입학도 가능할 것이다.

학생들은 매일 저녁, 자유시간이 도래하기 전 자신들이 배운 것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자신이 그날 무엇을 배웠는지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면 어린이 총회에서 이를 확인하고, 각 기업체에 피드백하는 것에 활용한다.

 

어린이 총회

 

어린이 자치는 교육지구의 핵심 사안이다. 자치의 중심축이 되는 어린이 총회는 중앙광장과 어린이 시청에서 이루어지며, 아고라의 형식을 띤다. 총회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을 열리도록 정해져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24시간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자치 하에 진행되며, 실제적인 광장도 24시간 중계되지만, 대부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총회의 권력은 일반사회와 비슷하게 분립될 수 있도록 한다.

대부분의 안건의 진행은 토론으로 이루어진다. 변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광장에서 변론에 대한 강의를 듣고 간다. 다양한 화술을 활용하게 되며, 총회에 제언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다. 머리를 쓰는 것에 지친 학생들은 중앙광장 맞은편의 제 2 광장과 예술회관으로 가곤 한다.

총회는 지역 어린이 총회, 전국 어린이 총회, 세계 어린이 총회로 분리되어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토의는 네트워크상으로 이루어지지만 전국, 세계 어린이 총회를 통해 직접 면대면으로 말문을 틀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전국 어린이 총회나 세계 어린이 총회는 각각 월 2, 격월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고, 대부분 토론회와 먹거리 장터, 전시·공연들을 동반한다. 물론 모든 관리는 개최한 지역 교육지구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거대한 문화교류이기에 각 지역의 프로젝트 성과를 겨루는 자리로도 이용되고 있다.

어린이 총회에서 사안이 결정되면, 이를 시행하기 위한 업무를 배정하고 분배하는 역할은 어른들의 도움이 적잖이 필요한다. 특정 아이들이 업무의 반복작업으로 인해

 

예술·체육

예술회관 앞에는 즉흥연주를 하는 학생들이 있으며, 어린이총회를 바탕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춤, 음악, 그림, 예술 전체를 아우르는 경합이나 대회가 지속적으로 열린다. 또한 공식·비공식 체육대회가 활성되어 있기에 동아리 중심으로 어느 시간대에도 연습 중에 임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 실제 사회의 운동선수들이 와서 특강을 펼치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시간대를 조정하는 역할은 어린이 총회에서 한다.

학교는 모든 공간이 자유 전시, 공연공간으로 활용된다. 물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예술회관 앞에서 하는 공연이 많지만, 예술 관련 프로젝트로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연극을 하는 학생들이나 건물 벽마다 그래비티를 그리는 아이들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세부 이론

 

·오 교육

배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로 여긴다. 이 두 종류의 감탄사를 내뱉기 위해 교육이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란 깨달음이다. 새로운 것을 알았을 때 보통 이런 감탄사가 나온다. 보통 지적인, 혹은 이성적인 앎을 통해서 나타나는 감탄사이다. “!”는 뭔가 멋진 것, 좋은 것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대부분 음악, 예술 쪽에서 반응되는 감탄사다.

, 성장은 !”!”로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합법적인 어떤 것도 시도해야하며

이 두 가지를 끌어내지 못하는 행위들은 대부분 시간낭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감동적인 것을 보거나, 슬픔을 느꼈을 때의 ...” 또한 고려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감동적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애매하기에 배제하기로 했다. , 아오교육이 아오후교육보다 어감적으로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사춘기를 가르치는 학교

아이들이 일탈을 하는 이유는 학교에서 일탈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일탈을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기에 일탈이라고 칭해지는지 아이들에게 세부적으로 보여주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바른 방식으로 일탈하게 해야 한다. 바른 방식으로 일탈, 우리는 이를 다른 말로 여가라고 부른다. 현대사회에서 게임이 성황리에 인기를 몰고 있는 것은, 학교에 게임이라는 교과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른들에게는 대들어야한다.’ ‘권력에는 반항해야한다.’

기억할만한 것은 없다.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을 뿐’ ‘자신이 선택하고 학교가 도울 뿐이다.’

누가 시키면 알기 싫다. 누가 가르치면 배우기 싫다. 누가 고르면 먹기 싫다. 내가 한다.’

삶이란 언제나 자기자신을 연기하는 것이다.’ ‘학생의 첫 의무는 학교를 부정하는 것이다.’

라는 사춘기적 의견들을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분명히 아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갈 것이라 여겨진다.

 

무지의 교육

아이들은 배울 권리가 있듯이, 배우지 않을 권리 또한 있다. 그렇기에 의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 교육이 필요하다. 앎에 있어서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부정할 필요가 있다. 뭔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뭔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일 터, 학생들에게 모름을 선택할 여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성찰적 교육

지금 배운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속임수를 써서는 안된다.

 

학교·교육 무용론적 교육

너희는 이걸 배워도 나중에 쓸모없을 거야.”라고 당당히 말하고 쓸모없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넘치는 교육. 결국 쓸모 없지만, 좋아서 배우는 것들이 세상에는 넘쳐나고, 너희들은 좋으면 배우라고 선택의 여지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총체예술(개념미술)적 교육 해석 교육

내가 좋은 그림이 좋은 그림이다.’를 기본으로 예술에 있어서 타인중심적이 아닌 자신의 감상과 자신의 해석을 통해 예술성을 토로할 수 있어야한다. ‘네가 선을 하나 그어도 그럴듯하게 말만 늘어놓으면 예술이다.’를 솔직하게 가르쳐야한다. 그 무엇이 되었든지 그럴듯하게 꾸며 예술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즉흥 교육

장기프로젝트도 좋지만, 자신이 지금 원하는 것을 지금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즉석으로 계획하고 실행하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즉흥적인 프로젝트들의 활성화로 직관적 사고가 충분히 훈련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주장논리적 교육

주장 후 근거를 찾는 훈련이 필요하다.

모든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모든 주장은 완벽하지 않다를 강조하고 그렇기에 무엇이든지 주장할만하다.’는 것을 인식시킨다. 무엇이든지 주장하고 비판할 수 있는 아이디어 폭투식 교육이 필요하다. 이로서 자신의 주장은 완벽하지 않다는 성찰적 바탕 위에 무작정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검토하며 직관적 사고를 훈련할 수 있도록 한다.

 

가장 일반적인 훈련의 예시다. 학생이 “AB식의 아무런 문장이나 말할 수 있도록 한다.

코끼리는 냉장고다라는 문장과 코끼리는 동물이다라는 문장이 나왔다고 할 시, 코끼리가 냉장고인 이유를 찾는 것, 이는 해석의 범위를 넓히는 예술·평론적 사고의 바탕이 되고, 코끼리가 동물인 이유를 찾는 것은 과학적 사고, 논리적 사고의 바탕이 된다.

그 후 코끼리가 동물이 아닌 이유를 찾아라.”, “코끼리가 냉장고가 아닌 이유를 찾아라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아이들의 상상력의 확장과 자신의 주장에 대한 재고를 통해 아이디어의 확장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선 주장, 후 해석. 이는 아이들의 생각의 자유도를 크게 바꿔 놓을 것이다.

 

모순·궤변 교육

누가 무엇이 나쁘다고 해도 필요할 때는 써먹는 인재를 만드는 교육. 현대사회까지 모순과 궤변은 너무 홀대를 받았다. 이미 명제 속에는 진리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의 논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논리적인 모순과 궤변에 진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쇼펜하우어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포함해서 수많은 처세술과 기술들 또한 학교에서 가르쳐야한다. 선택하지 않을 때, 아이들은 올바르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확실히 안 후, 선택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 학교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이다. 즉 학교가 학생 대신 선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취미교육

다시 한 번, 란 지극히 개인적 취미이다. 또한 모든 것이 자신의 취향에 따른다는 것을 알게하고, 또한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 이들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교육과정의 최종적인 목표이다.

 

*

 

닫으며

 

교육지구의 개념은 일종의 교육이상향Edu-topia면서, 교육반이상향Edu-distopia이라 할 수 있다. 안전과 감시는 불완전한 인간사회로서 당연히 묶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린이 사회 또한 어쩔 수 없이 전체 사회의 관심과 압박 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어른들의 에코스피어Ecosphere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의 손으로 만든 작은 이상적 사회이며, 외부사회에서 시행될 제도를 아이들 사회에 먼저 시도해보면서, 외부 사회에서 생길 문제들을 아이들의 사회에서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매우 거대한 모르모트로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을 부정 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가르침이 열린 세계, 이 세계의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치지 않을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copy-left, 아이들의 모든 정보는 공유되어야 하며, 개인정보란 없으며, 모든 행동이 분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 판단할 능력은 내게 없지만, 이 세계가 빅 브라더의 세계관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성적인 면에 대한 배려가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이것은 현 교육과정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교육과정이라는 주제 자체의 딜레마이기도 한다. 과정이라는 것은 아이디어다. 감동과 감격은 다르다. 누군가를 놀라게 할만한 아이디어는 충분히 있을만 하지만, 누군가를 뭉클하게 할 만한 아이디어...만만치 않을 것이다. 제시한 교육지구의 기본철학중 마지막에 제시된 그럼에도 모든 행동 중에서 사랑이 우러나오는 행위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상당히 부담스럽고 부끄러운 말이긴 하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쩔 수 없이 적용될 수 있는, 이른바 진리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여겨진다. 사랑 같이 애매한 명제를 학문적으로 논하는 것이 넌센스지만, 뭐 어떤가. 현재도 전인교육같은 걸 외치고 있는 판국에. 대체 인간에게 공통적 감성을 어떻게 가르친다는 건지. 애초에 가르칠 수 있는지도 미지수다.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만들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서라도 아이들을 가르칠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이상적인 교육과정이 유토피아가 되었든 디스토피아가 되었든 간에 아이들은 이 안에서 행복하다. 행복해야만 한다. 행복하지 않다면, 이 모든 것은 그 순간 재고의 여지없이 파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언제봐도 참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미 마을 학교들은 존재한다. 이 학교는 그 학교들의 조금 확장된 단계일 뿐이다. 현실의 벽이라는 건, 그저 상상력의 한계일 뿐이다. 세상은 언제나 상상한 것 이상으로 발전되어 있고, 찾아보다보면 그 이상으로 발전된 교육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상상한 교육이 없다면, 내가 만들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가 아니라, ‘그것이 좋은 학교인가, 아닌가.’, 그것이 좋은 교육인가, 아닌가 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통령이든, 교육부장관이든 맡아볼 자신이 있다. 이정도 급은 되어야지 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는 하지만.

물론 미래의 평범한 생활도 꿈꾸긴 한다. 집무실을 도서관에 합쳐서 아이들에게 책을 소개하거나 수다를 떨거나, 도서관에서 잔잔하게 재즈를 연주하며 쉼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가끔씩 교사들이 아이들과 와서 차를 마시다가 갈 수 있는 문화공간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을 꿈꾼다. 학교라는 문화공간의 책임자가 되길 바란다. 콘서트마스터이며, 지휘자이며, 큐레이터이며, 엔터테이너이자 연예인이자 MC로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것이다. 나의 의 로망일 뿐이다.

난 그 로망에서 멈추기에는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이미 교대에서 학교라는 제도가 얼마나 엉성하고, 빈틈이 많으며, 어째서 점점 망해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현 학교제도를 뒤집으려는 수많은 작은 혁명들이 존재함을 안다. 거기다 박근혜가 탄핵되었으며, 현재 사상 최대의 진보적 정부가 들어서 있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때 숟가락을 올리지 않으면 언제 올려보겠는가. 이참에 교육학개론 책에 이름 한 번 올려볼까, 하는 마음이 있다. 나의 비전은 너무나도 크다.

 

*

내 교육의 최종적인 목표는

변화를 가볍게 생각하는 풍조를 이끄는 것이다.

개나 소나 가르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학생들을 기르는 것이다.

 

가벼운 불평들, 프로불편러들, 찡찡론자들을 길러내는 것이다.

무섭고 무거운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

적을 공격하기 보다는 비꼬고 린치보다는 풍자가 대세다.

최악의 경우엔 큰집에 들어가도 삼시세끼는 나온다.

생존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를 생각하는 시대이다.

대충 적당히, 그러나 "커다랗게!" 변화할 수 있는 시대이다.

 

젊은 교사는 젊은 가르침을

나인든 교사는 나이든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시절밖에 밖에 할 수 없는 말들과 교육이 있음을 정리하고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사회를 혼란으로, 개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어쨌든 오늘도 한 끼 먹고 살았고

재있게 살았는데 뭐, 하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발전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머무르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뒤집는 것이다. 마구 뒤집고 뒤집을 걸 다시 뒤집어서

"뒤집는 것 따윈 쉬운 일이다."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어 세상에 기반따위는 없고

모조리 다 애매한 것이며, 바뀌는 것이 일상화되고 신경도 쓰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이를 통해 "아무렴 어때"하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가득 찬 세상을 만들고 싶다.

이는 고급스럽게 말하면 관용이 가득한 세상이다.

 

어떤 주장이든 주장되고 까이고

이에 대해서 아무도 불이익이 없는 세상을 가져오고 싶다

실수가 일상화되어도 약간의 비판과 어우러지고

그 후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마무리 되는 세상.

 

현재교육은 "안물 교육"이다. 안 물어본 것을 억지로 가르쳐주는 설명충 교육.

 

안 물어본 걸 왜 가르칠까? 필요하다고? 필요할 걸 어떻게 알아?

당신이 필요했다고? 진짜 필요했는지는 둘째 치고 당신이 필요했다고 애들이 필요하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뭘 가르치고 싶다면 애들을 궁금하게 만들어야한다. 그리고 물어보게 만들어야한다. 나는 아이들이 그 어느 때라도 당당하게 지식을 요청하게 만들겠다.

 

난 당당하게 삼천포로 빠지는 교사가 되겠다. 그리고 삼천포에서 아이들에게 분명히 무언가를 가르칠 것이다. 만약 가르치지 못한다면, 최소한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교육에는 자유로움이 필요하다.

이는 앎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면서

무지로부터의 자유로움이기도 해야한다.

 

나는 단어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달리기보다 언제나 새 개념을 창조할 것이다.

나는 발전하고, 자라남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비뚤어진 교사가 그나마 덜 삐뚤어진 아이들을 만든다

나는 때로는 반면교사가 되기를 자처하겠다.

내가 완벽하지 않음을 솔직히 드러내고, 아이들에게 사과할 것이다.

곧은 솔직함은 무모이고

비뚤어진 솔직함은 처세이다.

나는 이를 숨기지 않고 아이들에게 무모함과 처세술을 당당히 가르칠 것이다.

예의와 알랑방귀의 차이는 어디에도 없다. 동전의 양면에만 있을 뿐.

또한 애써 진지해질 필요 또한 어디에도 없다.

 

이 시대 최고의 말썽쟁이들을 키워내겠다

 

엄마 말만 듣는 아이들에게 미래를

주먹을 믿는 아이들에게 지적 폭력을

완벽주의 아이들에게는 모순된 세상을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들에게 도피할 취미를

보여주고, 인지시키고, 이를 자유롭게 다루게 만들겠다,

알려줄 것이다 너희들이 누구를 만날 수 있고, 만나게 될 것인지

그리고 너희가 누구인지 진짜 그 무엇도 될 수 있을지

 

아이들이 성인聖人이 되게 하지 않겠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가르치겠다.

타인을 의심할 수 있고, 의심받을 수 있는 사회인이 되게 하겠다.

감동시켜 속이기보다

서로 웃어대며 상호이용하는 학급이 되기를 바란다.

모든 위선의 등을 들쳐보기를 마다하지 아니하는

최악을 상정하기에 빛을 볼 수 있는 아이들이 되기를 바란다.

생각이 없더라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채로 생각이 없어지길 바란다.

이왕이면 교실에 너구리들이 가득하길 바란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은 멍청한 말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지.

나를 알고 적을 알아도, 백전백패하기 충분한 게 세상이다.

안 될 놈은 안 된다. 잘 될 놈은 계속 잘된다.

하지만 그 안 된 놈도, 분명 어딘가에서는 잘 될 수 있다.

그건, 이론이라기보다는 신앙이다.

하지만 무식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원동력으로 살고 있으며

가끔은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는 묘한 것.

학교가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희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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