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사람들 "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한다. 마라톤은 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고난과 위험이 닥쳐올지라도, 그 목표가 그를 목표지점까지 인도해 준다.
누구나 인생을 목표를 갖고 있다. 그 목표가 그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며, 결국 그의 전 생애를 인도할 것이다. 그래서 어느 현자는 젊은이들에게 대망을 품으라고 충고했다. 이와같이 인생의 목표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왜 그런 목표를 정했고 어떻게 그것을 달성하는 가이다. 그리고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현대인들의 공통된 목표는 돈을 버는 것, 출세하는 것, 연예인이 되는 것, 권력을 잡는 것 등이다. 그들은 그 목표를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의 현대사를 얼룩지게 했던 여러 가지 사건들-3.15부정선거, 5.16쿠데타, 10월유신, 12.12.쿠데타, 수서비리사건, 한보사태, 김현철씨 비리사건 등-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돈, 출세, 부와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들을 얻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그것을 손에 넣은 후에도 그것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 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전반에서 많은 문제들이 곪아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출세한 사람들, 부와 권력을 가진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와 자신의 가족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돈, 부와 권력의 원래 목적을 잊어버린 채 단지 그것들을 얻기 위해 정신없이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왜 그것들을 얻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들은 돈, 부와 권력, 출세가 그들의 삶의 방편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애의 전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시간을 절약해서 돈을 벌고 출세하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회색 도당들에게 시간과 자신들의 행복과 삶의 의미까지 모두 잃어버리고 시간과 돈의 노예로 사는 사랍들처럼 되어버렸다.
돈이 많은 사람들, 권력을 가진자들, 출세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돈이나 권력을 획득해야될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에 우리들은 참으로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수 있을 것이고 ,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물질만능주의는 사라지고 인간소외, 상대적 박탈감, 사회적 부조리 등이 많이 줄어 들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도록 노력하는 사회이다.
우리 크리스챤들의 삶의 목적과 방법은 이런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딤전6:10,17-18). 하나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선행과 자비를 베풀기를 요구하신다(시82:3-4,마19:21,갈6:10,히13:16).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 -사회적 약자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이방인으로 표현하였고, 오늘날에는 최소한 인간답게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지칭한다- 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리라(시112:9,잠14:31,사58:7-10,행20:35)
" 관심과 상상력이 부족한 그리스도인 "
얼마전에 나는 하루 금식을 했었다. 단지 세 끼를 굶는 것이었는데도 너무 힘이 들었다. 기도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오로지 죽 끓여 먹을 생각만 하면서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 12시가 되자마자 마무리 기도를 하고 나는 죽을 끓여서 허기진 배룰 채웠다. 비록 하루를 굶는 것이었지만, 내가 직접 당하는 고통이었기 때문에 죽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괴로움으로 느껴졌다.
그 짧은 금식을 통해서 나는 머리로만 이해했던 북한 사람들의 기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어 댈 때도 '불쌍하다, 안타깝다' 라는 감정이 일었을 뿐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눅19:41). 왜 우셨을까?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고-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되고 관심에 의해 지속된다- 그들이 당하게 될 고난에 대해 상상해 보셨기 때문일 것이다.(눅19:42-44). 느헤미야는 바빌론으로 포로되어 잡혀가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바빌론 궁전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상상을 통해 느낀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문제해결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기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너진 성을 재건할 수 있었다.(느1:2-11).
우리는 예수님과 느헤미야처럼 이웃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고난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아닐까.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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