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세이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미래 교육 2008. 3. 7. 01:35

         "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

어떤 율법사가 자신의 지식과 의를 드러내려고 예수님께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너의 이웃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답변하시지 않고 전혀 다른 얘기를 하셨다.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다.

율법사는 "나"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강도 만난자"-즉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때, 이웃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이웃이란 "나"의 옆에 살고 있거나 나의 친척들 또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든 아니든, 나의 주변에 살든 아니든, 그러한 공간과 안면을 초월하여 어려움에 처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이다.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말할 때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의 이웃은 지난 며칠 동안의 집중호우로 어려움을 당한 자들, 점심을 굶는 아이들, 수 년 동안의 가뭄과 기근으로 굶어죽어 가는 북한 주민들, 그리고 가뭄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난민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나의 이웃인 것이다.

이들이 나의 이웃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도와주어야 할까? 우리가 남겨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연간 10조원에 달한다. 우리가 소비를 조금 줄인다면, 우리의 이웃을 충분히 도울 수 있다. 하루에 800원이며 한 어린이가 점심을 먹을 수 있고, 한달에 10,000원이면 북한 동포 두사람의 한달 생활비를 보조해 줄 수 있고, 월 2만원이면 아프리카 난민들의 한달 생활비를 보조해 줄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국제기아대책기구(544-9544) 또는 한국이웃 사랑회(704-9923) 등으로 연락하면, 우리의 작은 정성을 이웃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것입니다.




" 서로 이해하고 관용하자! "


"00는 항상 왜 그렇지. 마음에 안 들어", "00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도대체 크리스챤 같은 생각이 안 들어." "00형제는 독똑하기는 하지만, 신앙의 깊이가 없어, . . .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 형제의 결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

"00자매는 눈이 너무 높아서 왠만한 형제는 쳐다보지도 않아. 그렇게 눈이 높아서 언제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자기 주제를 파악해야지!"

이런 말들은 "마피아 게임"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 게임은 자신은 정직하고 믿을 만 하지만, 다른 사람은 부정직하며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험담을 해야하는 놀이이다. 우리는 이 게임을 하기 위해 특별한 기술이나 규칙을 배울 필요가 없다. 대부분 우린 이미 그런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험담이나 비방의 기술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험담과 비방이 세상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도 무의식중에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크리스챤들이 서로 비판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대신에 서로 이해하며 관용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 . .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롬14:1-3).

사도 바울이 말하는 관용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 가치관,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따라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관용은 내 마음에 안 들고 애 생각이나 가치관과 다르지만, 다른 사람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참아주고 공존하려는 태도이다. 요즘같이 다원적인 사회에서 우리 크리스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관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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