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저역시도 교대를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었습니다. 젊은 날의 패기로 가득 차 있었던 20살의 저는 무언가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갈망했었습니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업을 떠올려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뭔가 여유롭고 현실에 안주하는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봤을 땐 너무나도 철이 없을진 모르지만 그 때 당시에는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성공스토리를 꿈꾸며 가슴 설레하였던 저에게 교대는 그 꿈을 실현시켜주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교대는 저에게 있어서 내가 싫어하는 분야도 하게끔 하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대의 특성상 12개 과목을 다 배워야했고, 그 와중에 내가 싫어하는 과목마저도 해야 하는 대학생활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꿈꿔왔던 대학생활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까지의 공부가 대입을 위하여 정해진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었다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내가 관심있는 분야의 공부를 찾아서 하는 보다 능동적인 공부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천성적으로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1학년 1학기 4월 초 쯤에 나간 교생실습에서의 하루하루는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쉬는시간 마다 달려들어 놀아달라고 보채는 아이들이 마냥 귀찮기만 했고 가끔 버릇없는 아이가 나에게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에는 교대가 정말 내 길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에게 터닝포인트가 찾아왔습니다. 2학년 2학기 때 나갔던 교육봉사에가 바로 그 전환점입니다. 처음 평화지역아동센터로 교육봉사를 나갔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도저히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들 하나하나의 가정배경 및 성격 등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아이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2학년 2학기 10월 초에 나갔던 교생실습은 1학년 1학기 4월 초에 나갔던 교생실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이들이 예뻐 보이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도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교대에 대하여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교사라는 직업을 생각해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여유롭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제가 이때까지 만나왔던 선생님들 대부분이 그러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연구하는 진취적인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년 후 저의 모습은 아직은 신입 교사인지라 부족한 면은 많을지라도 아이들에 대한 열정만은 가득할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꼭 주입하고 가르치기 보다는 서로 뒹굴고 뛰어놀면서 서로가 가르치며 배우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정신을 실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10년 후 저의 모습은 교직생활에 어느정도 완벽히 적응했을 것입니다. 어느 분야의 일이건간에 10년을 종사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에는 열정뿐만 아니라 교사로서의 자질 또한 충분하여 아이들에게 참교육을 실현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10년 후 쯤의 저는 결혼을 하여 아이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보다 아이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20년 후의 저의 모습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치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20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며 한 가지 일만 계속하다보면 매너리즘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저의 모습에 쉽게 수긍하고 체념하지 않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30년 후의 저의 모습은 시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학창시절 때에도 정년이 얼마 남지 않으신 선생님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 분들은 뭔가 느리셨습니다. 말투, 행동 등도 느렸던 것 같지만 무엇보다도 사고방식이 약간 구시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모습을 경계하여 대비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