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경향신문> "매거진 X" 코너에 2000. 9. 21. 보도된 자료입니다.
‘1교사 2과목’그래도 됩니까?
-부당한 교육관행 제소한 박상준 교사-
우리는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고 있는 불법과 불합리에 익숙해 있다. 이른바 ‘상치(相馳)교사’라는 교육계의 해묵은 관행도 그 가운데 하나다. 상치교사란 혼자서 2과목 이상을 담당하는 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사회 교사는 사회만 가르치고 윤리 교사는 윤리만 담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학교 현장에서는 사회 교사가 윤리를 가르치고 윤리 교사가 사회나 역사를 맡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른 과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어 교사가 한문을 가르치고 지구과학 교사는 물리를 가르친다. 독일어나 불어 교사 중에는 본업을 제쳐놓고 영어 과목을 전담하는 경우도 있다.
교육 당국은 예산 부족과 교육과정 변화 등을 이유로 상치교사 제도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교원의 전문성 등을 규정한 교육기본법 등에 상충된다. 만약 내과전문의가 의사라는 이유로 안과나 비뇨기과 진료를 한다면 환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양약사가 한약조제 자격 없이 한약을 조제하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소비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박상준씨(32). 그는 이같은 상치교사 제도의 불합리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5개월여에 걸친 소송 끝에 상치교사 제도가 헌법에 보장된 학생들의 교육권을 침해한다는 판결을 얻어냈다. 지난 8월18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을 때 신문 사회면 귀퉁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교사에게 전공과목이 아닌 다른 과목 수업을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는 “사회과목 담당교사에게 국사과목까지 가르치게 한 것은 부당하다”며 전 배재고 교사 박상준씨가 학교측을 상대로 낸 국사 교과수업 배정중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의 판결 내용을 정리하면 사회 교과를 담당하는 박씨에게 학교측이 국사를 가르치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교사가 전공과목이 아닌 교과를 가르칠 경우 교육의 질이 떨어져 헌법에 보장된 학생들의 교육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고 단순한 귀결이지만 이번 판결이 교육현장에 미칠 파급은 실로 엄청나다. 교육현장에 수십년째 만연해 있는 상치교사 제도는 이로써 위법이라는 유권해석이 내려졌다. 전국적으로 수천명에 달하는 상치교사들은 지금부터 원하지 않을 경우 전공이 아닌 다른 과목을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상치교사의 수업에 대해 학생이나 학부모가 반대할 수 있는 명분도 생겼다. 법원의 판례가 생긴 덕분이다.(학교측은 항소를 포기, 이번 판결은 확고한 판례로 굳어졌다)
교육 당국은 비상이 걸렸다. 상치교사 해소를 위해 교원을 늘려야 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당장 수백억원의 예산을 교사 증원에 투입해야 한다. 교육부는 이제서야 부랴부랴 전국의 상치교사 현황파악에 착수했다. 국·공립에 비해 상치교사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사립학교들은 교사 채용을 위한 재정확충 방안이 시급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상치교사는 학생이나 교사 누구나 겪는 부조리입니다. 그러나 관행으로 여기고 제도를 뜯어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부 역시 예산부족, 학교의 자율성 존중 운운하면서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교사들과 학부모들은 그의 이번 소송이 우리 교육의 질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돌아간 것은 해임이라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박씨는 지난 7월까지 교사 신분이었다. 그러나 상치교사 문제로 소송을 제기한 것 등이 이유가 돼 여름방학 직전 학교에서 해직됐다. 그의 노력으로 우리 교육 발전을 가로막아온 수많은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제거됐지만 정작 그는 교단에 설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사회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서울 배재고에서 1996년부터 교편을 잡았다. 담당은 사회. 그런 그에게 학교측은 지난해에는 윤리를, 올해는 국사를 가르칠 것을 요구했다. 담당 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윤리나 국사 과목은 대학에서 공부한 바가 없어 학생들에게 가르칠 능력이 없다”며 학교측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측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학교측은 소송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재단이사회를 열어 그를 해임해버렸다.
학교측은 “박씨가 학교장의 합리적인 학교 운영을 방해하고, 학교장 등과 협의 없이 학교의 중요한 문제들을 단독으로 처리하는 등 여러 차례 물의를 빚어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며 “소송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료 교사들은 “학교측이 박교사를 해임한 것은 부당하고도 가혹하다”며 “박교사가 상치교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측을 상대로 소송을 내고 시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5개월에 걸친 심리 끝에 법원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법원의 판결 덕분에 제자들에게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아직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원상 복직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의 해임이 정당한가를 놓고 교원징계재심위원회가 열린다. 해임의 일차적 원인이 학교측의 상치교사 요구에 대한 반발이었으므로 이번 판결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겠지만 복직 결정이 난다 하더라도 학교측이 그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그는 “이제 복직을 위해 또 한번의 힘겨운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며 “잘못된 교육관행을 고치는 데 교사나 학부모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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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상치교사, 서울에만 어림잡아 1,000명 이상
서울 ㅅ중 이모 교사는 대학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학기부터 학교에서 컴퓨터 수업도 담당하고 있다. 음악은 1주일에 16시간, 컴퓨터는 5시간이다. 나이가 40줄에 이른 이교사는 “솔직히 컴퓨터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교과서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실제 그는 올해 수업을 맡기 전까지 컴퓨터에 스위치가 어디 달려있는지조차 모르는 컴맹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컴퓨터 용어와 프로그래밍 기술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다 보면 죄책감마저 든다”며 “상치교사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 ㄱ고 김모 교사는 사회와 윤리 두 과목을 맡고 있다. 사회가 전공인데 윤리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사회는 주당 12시간, 윤리는 6시간을 가르친다. 김교사는 “윤리는 전공이 아닌 탓에 자신이 없다”며 “강의는 교과서와 관련 참고서를 달달 외워 학생들에게 그대로 내뱉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에서는 지난 학기 김교사가 가르치는 학급과 윤리 전공 교사가 가르치는 학급간에 윤리 과목에서 7~10점의 점수 차가 발생, 학부모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실정이지만 교육 관료들은 여전히 상치교사 문제에 대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다. 상치교사는 비교적 사정이 양호한 서울지역 공립 중·고등학교의 경우에도 학교당 1~3명에 이른다. 서울시내 공립 중·고교가 341개교, 사립은 310개교이므로 서울에만 어림잡아 1,000명 이상의 상치교사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서울시 교육청에서 교원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모 장학관은 “사립을 포함, 서울시내 전체 중·고등학교의 상치교사 수는 통틀어 100명 선에 불과하다”며 상치교사 문제를 축소하기에 바빴다. 게다가 그는 “이번 법원의 판결은 판사들이 교육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것이고 소송을 제기한 박교사는 성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신공격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교육행정가들의 인식이 이런 수준이므로 지금껏 상치교사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전교조 한만중 정책기획국장(37)은 “예산부족으로 상치교사가 존속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할 것이 아니라 1982년 이후 국민들로부터 36조원이나 거둬간 교육세가 과연 합리적으로 집행되고 있는지 원점에서 냉철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창민기자 riski@kyunghyang.com/
최종 편집 : 2000 년 09월 20일 1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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