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장래희망을 써 넣는 칸에 고민 고민을 하다가 선생님이라고 썼었다. 누가 볼까봐 왼손으로 가리고 얼른 써서 냈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열한 살, 4학년이 되고 3월이었다. 집에서의 나는 어리광도 잘 부리고 이웃집의 동생들이나 친구들과는 활발하게 잘 뛰어 놀았는데 학교에서는 유독 조용한 아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나가서 땅따먹기나 오징어다리, 고무줄놀이 같은 것은 하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지도 않았고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짝꿍과 공기놀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우 소극적인 성격의 아이였는데 그 때 담임선생님은 나의 소극적인 성격에 있어 전환점을 가져다 준 분이셨다. 맞벌이로 바쁘신 부모님은 집에서도 나와 놀아줄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 내게 담임선생님은 삼촌 같은 다정한 분이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 모두 선생님을 연예인과 같은 존재로 좋아하며 잘 따랐다. 선생님이 동화인지 직접 지으신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는 정말 숨소리 하나 안 나게 교실은 조용했고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학교에 빨리 가고 싶을 정도로 선생님을 좋아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학교 가는 재미를 찾게 되었고 ‘우리 담임선생님이 내년에도 또 그 다음해도 담임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 기타를 치면서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어느 날 교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이리 와 보라고 하시곤 무릎에 앉혀놓고 노래를 불러주셨다. 선생님이 그날 나에게 보인 그 관심과 지나가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었고 학교에 적응해 나가는 시작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학교에서 우리 동네에서와 같은 활발함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장래희망이 선생님이 된 데에는 직접적으로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영향이 있던 것이 아닐까.
나의 비전, 사실 이 크나큰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나는 어떤 교사가 되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 것인가?
이것은 내가 교육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부터 생각해 왔던 문제이다. 내가 교단에 서서 초등학교 시절에만 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어린 아이들 앞에서 그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교대생으로 산지 3년째에 접어들었다. 나는 어떤 교사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으로는 벌써 몇 번이나 고심을 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비전에 관해서는 이번 해에 들어 와 처음으로 스스로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다. 나는 전주교대에 입학을 해서 두 번의 실습을 나갔었다. 첫 번째 실습은 처음으로 정장을 입고 학교에 가니 아이들이 “선생님!” 이라고 불러주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이 아이들 눈에는 내가 선생님으로 보이는 구나. 나는 아직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된 학생일 뿐인데...’ 이런 생각을 하며 일주일동안 아이들에게 차별하지 않고 관심을 주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하지만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쉬는 시간마다 말을 걸고 더 잘 따르는 아이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교생 선생님이 되어서 처음으로 갔었던 초등학교 교실은 지금 생각해도 설레기만 하다.
그리고 내가 두 번째 실습을 갔을 때는 초등학교 1학년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1학년 반에 들어가 일곱 살 여덟 살 밖에 안 된 어린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를 입학했을 때 나는 한글을 읽을 수 있고 쓰는 것은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 때 당시 나는 반 서른 세 명 중에 30등이라고 했다. 같은 건물 3학년에 친 오빠가 다니고 있었고 당시 오빠는 전교 1등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무척 당황을 하셨나보다. 담임선생님은 엄마에게 학원에 다니는 것을 추천하셨다고 한다. 1학년인 나는 학교라는 커다란 기관이 낯설고 그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생님이 그저 무서웠고 주위의 아이들은 관찰의 대상이었고 선생님의 설명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뿐 이었다. 그때부터 오빠와 나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뒤로 초등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6년 동안을 다니고 중학교 때까진 공부가 재미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집에서 어린 나를 앉혀놓고 연습장에 우리나라 지도를 숫자 3자 비슷하게 그려놓고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싸움에 대해서 라든가 부여, 말갈족, 여진족 등에 대해 열띠게 설명 해 주곤 했다. 물론 나는 못 알아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면 계속 반복해서 말을 하는 오빠 때문에 그냥 여기가 어디라고? 물어보면 그림을 외워서 대답을 했다. 만약 그때 학원에 보내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항상 30등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 오빠 옆에서 습관을 잘 배워 자연스럽게 중간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삐약삐약 대는 1학년 아이들을 하교지도하고 교차실습으로 4학년 반에 두 번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쉬는 시간에 4학년 반에 들어 가 보니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랑 같이 하자, 편짜서.”라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무 반가워하면서 “와, 선생님 공기 잘하세요?” 라며 신기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공기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떨어져라. 떨어져라. 못 잡아라. 아 아깝다~.” 며 계속 이야기를 했고 내 차례가 되어 공기를 잘하자 아이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선생님 우리 반에 있어요, 계속. 이 선생님 좀 특이하다. 진짜 선생님 같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도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한 시간을 들어갔을 뿐인데 쉬는 시간에 그 반 아이들은 학교에서 나를 만나서 꼭 인사를 하고 가곤 했다. 이 때 느낀 것이 선생님이라고 꼭 학생들과 선을 그을 필요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다. 나의 어린 시절에 선생님이 그러셨듯이 나는 아이들에게 어렵지 않고 큰언니 같은 친근함을 가지고 대해야겠다.
내가 23세가 되어서 아직도 열 살 때의 나를 그때 학교에서의 상황을 이렇게도 잘 기억하고 있다. 교사의 진심어린 애정과 관심이 미약하고 어린 아동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것 같다.
정말 진실하고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교사는 제자에게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런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받았던 그 사랑을 나처럼 학교에서 그늘에 가려진 아이들에게 조금은 더 주고 싶다. 나는 교사가 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마음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뜨거운 심장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내가 더 갖춰야 할 것이 있다. 아이들에 대한 그런 마음과 함께 나의 전문성을 신장해야 한다. 초등교육은 다른 교육과 비교해서 볼 때 만6세부터 12세까지의 나이를 상대로 하는 긴 기간의 교육과정이다. 아동들은 모든 영역에 걸쳐서 왕성한 성장과 발달을 하므로 교사가 이것을 고루 발달시킬 필요가 있다. 내가 교원대학교에서 면접을 볼 때 시험문제 중 하나가 교사가 전문직이라고 생각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전문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통합적인 안목을 고루 갖춘 교육학 전문가, 생활지도의 전문가, 전체 교과를 가르칠 수 있는 교과 교육전문가, 아동 발달 수준에 따라서 가르칠 수 있는 수업 기술의 전문가, 사명감과 봉사정신이 있는 전문가. 이 모든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 나는 지금도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공부해야 하지만 교육대학교를 다니는 4년 동안 다 배우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를 위해서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개괄적이지만 큰 틀을 생각해 보았다.
5년 뒤의 나는 교직생활을 3 년째에 접어 들 때이다. 아직은 서투르지만 아이들을 조금씩 알아가며 보살펴주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 많이 접촉하고 경험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잠시 외국어에 대해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실용적인 영어회화나 중국어를 잘해서 언어에 대해서 공부를 해봐도 괜찮겠다고 느꼈다. 지금은 초등학교에서도 영어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고 내가 잘 할 수 있고 흥미를 느끼는 부분을 살릴 수 있도록 영어 및 회화를 계속해서 공부할 것이다. 또, 교육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마음먹었던 일인 한국교원대학교의 대학원에 시험을 보고 합격한 뒤 보다 심도적인 초등교육을 전공을 해서 교과 교육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조금 더 내 아이들에게 자신감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한 기초 공사를 하는 기간이 교육대학교를 다니는 4년이라면 창문을 달고 바닥을 깔고 도배를 해서 집다운 모양을 갖추는 기간이 발령받아서 아이들과 처음 만나서 근무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미흡한 부분을 점검하고 보완해서 완전한 집처럼 보여질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것이 대학원에 다니는 2년이라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집안은 아직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다. 나의 꿈을 어느 정도 이룩해 놓은 뒤에 진정하게 나의 집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10년 뒤의 나는 가정을 이루어 내 자식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교에서의 내 아이들에게도 또 다른 마음가짐으로 대할 것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창가의 토토’ 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내 친구 중 한명이 소설을 쓰고 책도 정말 많이 읽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좋은 책이 몇 권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그 당시 우리 중학교는 아이들의 성적에 민감한 학교였다. 내가 살던 청주에서 1순위였던 중학교였기 때문에 공부와 관련되지 않은 모든 것에 억압이 정말 심했다. 토토와 나의 초등학교 첫 생활과는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점점 대안교육이 조금씩 내비춰지고 있는데 아직 미흡하고 대중화되지 않았다. 나는 대안교육과 자유 학교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독일 같은 대안 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조기 교육, 선행학습이라고 해서 학교를 마치고 줄곧 학원행을 하는 우리나라의 아이들을 숨 막히게 하는 교육과정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방법의 교육 형태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싶다.
20년 뒤의 나는 대안 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 현장에 나가서 아이들과 공부를 할 거 것이다. 공부 시간에 주위가 산만해 함께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문제아, 부적응아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남다른 행동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집 안 환경은 어떤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 할 것이다.
30년 뒤의 나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공기와 울창한 숲과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곳에 터를 잡아 작은 학교를 여는 주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작년과 재작년에 아해삶이라는 동아리에서 지리산 계절학교라고 해서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 1주일씩 캠프와 비슷하게 하는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그 곳 지리산에는 작은 학교라고 하는 대안학교가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대안 학교가 있네라는 생각에 한번 가보았는데 정말 교실의 생김새가 다른 학교였다. 작은 학교의 선생님은 일반 대학을 졸업하시고 오신 분도 계셨고 자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주민들도 될 수 있었고 지리산 실상사의 스님도 될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내가 학교 다닐 때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래도 초등학교 때 학원을 다니기는 했지만 길어도 2시간동안 수업을 받는 학원 하나였다. 그 학원을 마치고 나면 나는 또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고무줄놀이를 하며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뛰어 놀기 바빴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을 학교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기 전에 그 속에는 부모들의 일그러진 성적 집착 병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는 아이에게 아름다운 시각도 청각도 감성도 키워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성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부모들은 자신의 소중한 아이를 대안 학교에 보낼 것이다. 나는 하나 둘 씩 발걸음을 옮기게 될 아이들을 위해서 그동안 고심하고 열심히 배우고 학교 현장에서 경험하고 자극받은 것들을 바탕으로 내 작은 학교를 잘 꾸려나가도록 하겠다.
토토의 할아버지, 고바야시 교장선생님과 같은 열정, 그 이상의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꿈을 가져본다. 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 될 밑그림을 그려보고 나니 정말 흐뭇하다. 막연한 생각으로만 뜬 구름 잡는 식이었던 나의 인생이 글로 정리를 하고 나니 갈피를 잡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분명해 진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이렇게 많다는 데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나의 좌우명 Seize the day! Carpediem. 처럼 현재를 즐기고 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이든 잘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