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교생이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시골학교에 다녔다. 학교 주위는 이리보나 저리보나 논밭밖에 없었고 근처에는 놀이 시설 하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놀이터는 바로 학교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어떤 날은 운동장에서 뛰어 놀기도 하였고, 또 어떤 날은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다같이 모여 하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 협동 숙제를 하면서 모르는 것들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학원 하나 없는 곳에서 우리는 즐겁게 공부를 했다. 친구들이 내가 가르쳐주는 것을 들으면서 "아~ 소연아 니가 알려주니까 정말 이해가 잘된다. 넌 커서 선생님해도 되겠다."라고 말을 해줬던 것이 지금 나의 모습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친구들을 가르쳐주는 것이 좋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면 난 또 한번 되새길 수 있었고 친구들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나도 좋았었다.
학생 수가 적었던 만큼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과도 한 가족처럼 지냈다. 농번기에는 선생님이 아이들 집을 직접 찾아가면서 부족한 일손을 채워주시기도 하였고, 모든 수업들은 교실 안에서가 아니라 논과 밭으로 직접 다니면서 실습 위주의 수업들을 했다. 학교에서 텐트를 치고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누가 더 무섭게 학교 괴담을 이야기 하나 내기를 했다가 다같이 울기도 하고 우리가 크면 다들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밤을 지새웠었다. 그 때 난 항상 "선생님같은 선생님이 될거야!"라고 말했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소연이 너는 정말 잘 해낼거야. 나같이 부족한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더더 훌륭한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격려해주시기도 하셨다.
아무리 사회가 변하고 교육이 땅으로 추락을 했어도 내가 생각하는 학교는 이런 곳이다. 가족같고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곳.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의 꿈을 춤추게 만들고 더 많은 별들을 키워주는 곳. 내가 생각하는 학교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교육대학교에 왔다. 한번의 실패를 했기에 더욱 절실했다. 그런데 교대생활 3년이 지난 후 지금 내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전의 희망과 꿈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바쁜 생활 속에서 과제를 하고 조모임을 하고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내일 해가야 할 것들만 생각하면서 선생님이 되면 편하니까... 안정적이니까... 라며 교대 생활을 해온 것 같다. 한번도 되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해서 느끼지 못했었는데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진정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비전선언은 미래의 나의 모습 뿐만 아니라 과거의 나의 모습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더욱 자세하게 나의 비전을 세워본다.
5년후
나는 28살의 4년차 교사이다. 아이들은 나를 좋아하고 항상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왜냐하면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 업무는 조금 힘들다. 아이들만 신경 쓰고 싶은데 현 교육의 시스템상 어쩔 때는 아이들을 자습시키면서도 공문을 처리할 때도 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학교 차원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수업 준비도 잘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더 많이 알려주려고 하고, 학교 생활 외에도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따로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는 대학원에 진학을 한다. 전공은 교육연극이다. 대학교 때 연극동아리에서 활동을 하면서 꿈꿨던 것이 나중에 교직 현장에 나가면 아이들과 연극을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더 전문적으로 교육연극을 배워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대학원 생활을 할 것이다.
10년후
나는 벌써 33살의 9년차 교사이다. 거의 10년이 되어가다 보니 수업 노하우도 많이 생기고 공문 처리 할 것도 신입때보다 조금 줄어들었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대학교 강사로 수업을 나가는 것이다. 대학원 전공을 살려서 교육연극으로! 아직 결혼은 안했다. 결혼은 늦게하면 늦게할 수록 좋고 안해도 좋고. 사실 나는 골드미스라고 생각한다. 하하하. 그리고 무엇보다 벌써 내 제자들이 대학교에 올라가서 나를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정말 뿌듯하다. 자기들이 원했던 꿈들을 이루려고 사회에 한발짝 나아가고 그것을 상의하려고 또 나에게 온다는 사실이 눈물나도록 행복하다. 학교 생활은 여전히 재미있다. 어쩔 때는 매일 똑같은 삶이라 지루할 때도 있지만 아이들은 하루하루 달라진다. 항상 생기발랄하고 귀엽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나의 노하우로 아이들에게 양질의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육연극이 좋은 평가를 받아서 점수를 많이 받고 있다. 하하하
20년후
나는 43살의 교육대학교 교육연극 전공 교수이다. 어떻게 교수를 생각했냐면 교육연극을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니 정말 좋은 것이더라. 그래서 나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아이들도 정말 예쁘지만 대학교에서 나의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해서 더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줬으면 한다. 그래서 대학교 교수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제자들은 이제 초등학교 아이들만이 아니다. 대학교에 들어온 제자들은 학구열이 높아서 내가 가르치고 하는 것들을 잘 따라온다. 나는 지루한 강의를 싫어한다. 그래서 거의 활동을 하면서 이론을 함께 알려준다. 그래서 학생들도 내 수업을 좋게 평가한다. 학생들 중에는 각별하게 나와 멘토 멘티를 하는 학생들도 있다. 우리 예비교사 제자들이 현장에 나가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나는 장문의 조언을 해주면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30년후
나는 53살의 교수이다. 내 제자들은 사회에 나가서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많다. 학교 강의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사회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퇴임 후 나에게 찾아오는 제자들이 많다. 마음이 잘 맞고 고마운 제자들 그리고 이들 덕분에 여전히 꿈꾸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 나는 시골에 살고 있다. 나의 고향. 따뜻했던 나의 유년시절을 추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즐겁다. 내가 평생 교사였다는 사실에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